이휘소 박사에 대한 진실

by 지나온 시간들

이휘소 박사는 1935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수재였던 그는 1947년 경기중학교에 입학해서도 특출 나게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가족은 마산으로 피난을 갔고, 1951년 경기중학교가 부산에 천막교실을 개설하자 마산에서부터 부산까지 통학을 하며 공부를 했다. 2년 후 그는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 입학 자격을 얻은 후 195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에 입학한 후 전공이었던 화학공학보다 물리학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학교 측에 전과를 요청했으나, 공과대학에서 문리과대학으로의 전과는 불가하다는 학교 측의 답변을 받는다. 이에 그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여 1955년 오하이오주 옥스퍼드(Oxford)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Miami University) 물리학과 학부과정으로 편입한다(플로리다 주의 휴양도시에 있는 대학은 Universty of Miami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고 프랭클린을 좋아했던 그는 그의 영어 이름을 ‘Benjamin Whisoh Lee’로 지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피츠버그 대학교(University of Pittsburgh) 석사과정으로 입학한다. 1957년 중국인 양전닝과 리정다오가 대칭성 파괴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물리학에 매진하게 된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0년 그는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박사학위를 마친 후 한국으로 귀국하려 하였으나 당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에 회의를 품고 마음을 바꾸어 1961년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 과학 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로 자리를 잡는다. 이 연구소는 아인슈타인이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휘소 박사의 전공분야는 입자물리학 이론이다. 그의 주된 연구과제는 양-밀스 게이지 장론(Yang-Mills gauge field theory)이다. 1967년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이 분야에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다. 흔히 Weinberg model이라 불리는 것으로 전자기력과 약력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이었다. 와인버그는 이 이론으로 1979년 노벨 물리학 상을 받는다.

하지만 와인버그 모형에서는 이론에서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인 재규격화를 해결하지 못했다. 와인버그 모형의 중요성을 직감한 이휘소 박사는 1972년 범함수 방법을 이용해 와인버그 모델의 재규격화에 성공한다. 아마 이휘소 박사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이 논문일 것이다.

이휘소 박사는 1933년 생이었던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초기 우주의 팽창의 흔적으로 쌍소멸을 통한 무겁고 안정적인 입자가 있을 것이라 예측하였다. 이 입자를 흔히 윔프(WIMP, 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s)라 한다. 이 논문은 1977년 7월에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에 실렸고, 이휘소 박사의 유작이다.

이휘소 박사는 1970년 프랑스 코르시아의 여름학교(summer school)에서 ‘비대칭 역학(Chiral Dynamics)’에 대한 강의를 하였는데, 이 강의를 듣던 토프트('t Hooft)는 이 강의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어 그의 지도 교수였던 벨트만(Veltman)과 함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이론은 너무 난해해서 통용되지는 않았다. 후에 이휘소 박사의 방법을 통해 토프트와 벨트만의 방법론이 인정을 받았으며 토프트와 벨트만은 이 업적으로 1999년 노벨 물리학 상을 받는다.

이휘소 박사의 연구 성과가 빛을 발하면서 1973년 그는 시카고 교외에 있는 페르미국립 입자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기서 그는 1974년 참(Charm) 쿼크의 질량을 예견한 <참 쿼크의 탐색>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얼마 후 브룩크헤븐(Brookhaven) 가속기 연구소의 새무얼 팅(Samuel Ting) 그리고 스탠퍼드 선형 입자 가속기 연구소의 버튼 리히터(Burton Richter)는 이휘소 박사의 예상과 맞는 제이/프사이 입자를 발견하게 되고, 이 두 사람 또한 1976년 노벨 물리학 상을 받는다.

1974년 서울대는 과학 분야 대학원 발전을 위해 당시 500만 달러를 빌리는 사업을 추진한다. 이 사업의 타당성을 위해 이휘소 박사는 평가 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이때 열악한 환경에서도 과학 분야에서 애쓰는 한국인 과학자들의 실상을 보고, 그는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 결심한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당시 유명한 물리학자들을 서울대로 초빙해 물리학 여름학교를 여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78년 여름부터 시작하려 하였다.

하지만 1977년 6월 이휘소 박사는 일리노이주 고속도로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1978년 그가 추진했던 여름학교는 한국 최초의 입자물리학 국제 대회인 ‘이휘소 추모 소립자 물리학 심포지엄’으로 대체되었다. 당시 한국 물리학회는 이휘소 박사에게 훈장 추서를 건의하였고, 사후에 이휘소 박사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한다.

흔히 이휘소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 당시 미국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우리나라 자체의 핵무기 개발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그건 소설의 내용에 불과하다.

이휘소 박사의 전공분야는 입자물리학의 게이지 이론이다. 소립자 이론은 핵무기 개발과 전혀 무관한 분야이다. 핵무기 개발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핵연료 농축과 관련한 제작 공정과 관련된 기술이다. 입자물리학 이론의 전공자가 이러한 것을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소가 지나가다가 웃을 일이다. 단순한 작가의 소설적 상상일 뿐이다. 실제로 이휘소 박사는 생전에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했고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1971년 한국 과학원(KIST)에서 이휘소 박사를 물리학 여름학교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였다. 1976년 6월 16일 오후 1시경, 이휘소 박사가 일리노이 주의 고속도로를 가족과 함께 운전하던 중, 다른 차선에서 가던 대형 유조차가 타이어가 터진 후 통제불능 상태에서 미끄러지면서 이휘소 박사가 운전하던 차를 덮쳤다. 이로 인해 이휘소 박사는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가족들은 중상을 입었다. 그는 한국에서 죽은 게 아니다.

또한 이휘소 박사가 받은 훈장은 국민훈장 동백장이다. 동백장은 3등급에 해당하는 훈장이다. 만약에 이휘소 박사가 미군 철수에 대응한 한국의 자주국방의 일환으로서 핵무기 개발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면 국민훈장 중 최고 등급인 무궁화, 아니면 최소한 2등급인 모란장 정도가 마땅하다. 훈장이 주어졌을 당시에도 이휘소 박사의 아내였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심만청(미국명 Marianne) 씨는 이휘소 박사가 훈장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한국 초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휘소 박사의 모친이 대신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이휘소 박사는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7년까지 20년 넘게 살았다. 그리고 1968년 그는 미국으로 귀화했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이중국적이 인정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원래 국적을 스스로 포기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 정부는 미국 국적 즉 시민권(US citizenship)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휘소 박사는 가족을 위해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경우이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미국 국적자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이다. 만약 그가 노벨상을 수상했다면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이 아닌 한국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의 노벨상 수상이다.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루머는 1989년 공석하 씨가 쓴 <핵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책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책 제목부터가 문제이다. 이휘소 박사는 핵물리학자가 아닌 입자물리학자이다. 핵물리학자와 입자물리학자는 전공분야가 다르다. 피아니스트를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 대해 이휘소 박사 유족이 반발하자 저자는 다시는 출판하지 않겠다고 유족들과 약속하지만, 1993년 김진명 씨가 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이 큰 인기를 끌자 그 약속을 깨고 <소설 이휘소>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을 했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이휘소 박사는 이용 후라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묘사되는데, 서울 북악 스카이웨이에서 삼청동 ‘삼원각’으로 가는 도중 조직폭력배 두목에 의해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으로 죽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서울에서 죽은 사람은 이휘소 박사가 아닌 소설에서 만들어진 주인공 ‘이용후’ 일뿐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 이용후는 제3공화국 당시 핵무기 개발계획을 위해 핵무기 설계도를 그의 다리뼈에 숨겨서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서술되어 있다. 1970년대 당시 어떻게 사람 다리뼈에 핵무기 설계도를 숨길 수 있는지 아무리 첨단 기술이라 할지라도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작가의 소설적 상상일 뿐이다.

지식은 정확해야 한다. 루머는 루머일 뿐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한 이야기이다. 소설을 읽고 재미있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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