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정조가 죽고 나서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당시 대왕대비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였는데 영조보다 무려 51세나 어렸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어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기에 정순왕후는 정조의 조모임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가 정조보다 7살이나 어렸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당시 정조의 탕평책은 힘을 잃어 시파와 벽파 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는데, 이때 벽파의 실세는 정순왕후의 오라비였던 김귀주였다. 벽파는 시파의 일부인 남인을 탄압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남인 중에 천주교도가 많았던 것이다. 천주교는 탄압을 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일어난 사건이 바로 신유박해다. 때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1801년이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가장 중요한 빌미였다. 황사영 백서에는 그리스도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청나라와 프랑스군을 동원하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조선 조정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그와 연루된 모든 자를 잡아들여 처벌하였다. 당시 처형시킨 사람만 140명에 이른다. 이 사건에 관계된 이들이 바로 정약용 형제들이었다.
정약용은 4형제의 넷째였고, 그 위로 정익현, 정약전, 정약종이 있었다. 황사영은 맏형인 정익현의 사위였다. 정약종은 천주교에 대한 믿음이 상당했는데, 황사영은 어릴 때부터 정약종을 스승으로 모셨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의 부인은 정약용 형제들의 누이였다. 즉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지간은 처남 매부 사이였던 것이다.
벽파의 시파에 대한 탄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천주교였기에 황사영 백서와 관련되어 정약용 형제들은 모두 신유박해에 걸려든다. 이승훈, 정약종, 황사영은 참수되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가 내려진다. 정약용은 정조가 가장 총애했던 신진관료였으나 젊은 나이에 그의 큰 뜻은 꺾이게 되고 만다. 정약전 또한 정조 재위 당시 병조좌랑을 역임한 수재였다. 정약용이 평생 가장 의지했던 이가 바로 정약전이었다. 두 형제의 스승은 실학의 대부 성호 이익이었다.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한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고,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두 형제는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꿋꿋하게 해 나간다.
맹자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君子深造之以道(군자심조지이도)
慾基自得居之安(욕기자득지야)
군자가 원칙과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득의 경지에 이르기 위함이다
자득의 경지에 이르면 사는 것이 안정되며 평안해진다.
여기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놓일지라도 그것을 다 이겨내고 헤쳐 나가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한다면 그 상황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1642년에 태어난 아이작 뉴턴은 1665년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이 2년간 휴교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뉴턴이 한참 학문에 빠져있을 때였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고향인 울즈소프에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다른 집으로 재혼을 해서 어린 시절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뉴턴은 학교도 가지 못하는 상황을 자신의 기회로 만들었다. 2년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몰입하여 홀로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칙인 운동의 법칙, 만유인력 법칙, 그리고 미적분학을 완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쓴 책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시피아)”로 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책이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자신의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한 결과였다.
정약전은 어릴 때부터 시간만 나면 배를 타고 강이나 호수에 나가 그물이나 낚시를 하는 등 물고기를 좋아했다.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정치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고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을 관찰하고 책을 썼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 전문 도서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다.
정약용 또한 유배 생활 18년 동안 스승인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 500권에 가까운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저술을 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다. 그의 실학사상은 당시 조선이 직면해 있는 모든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 탁월한 사상이었다. 시대를 앞서갔기에 당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후대는 그를 최고의 실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는 이미 조선 사회의 해체 현상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한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정조라는 탁월한 임금을 잃었기에 그의 사상은 빛을 볼 수 없었다. 목민심서의 사상은 현재의 민주주의 사상과도 틀을 같이 한다. 그의 이상적인 왕도정치사상이 좌절되어 가는 과정에서 조선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정약전과 정약용 두 형제에게 있어 유배라는 형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기회로 만들었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다. 그것을 기회로 반전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상황을 탓하기만 하며 다른 곳에 이유를 찾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다 것이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어느덧 무엇인가를 얻게 될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것이 쌓인 경지를 “자득”이라 표현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상황에 연연해하지 않고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해지지 않을까?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상황을 하나하나 이겨내다 보면 그때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이제는 그 어떤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며 내가 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기만 하면 될 듯하다. 그 어떤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