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은 영동과 영서 지방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설악산 국립 공원에 속한다. 한계령을 중심으로 영동 지방 쪽으로는 양양이 위치해 있고, 영서 쪽으로는 인제군이다. 해발 1,004m로 설악산 대청봉으로 갈 수 있는 등산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한계령에서 설악산 쪽으로 보면 웅대한 바위들이 위치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 그 옛날, 도로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 한계령을 넘어 영동과 영서를 오고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너무나 힘든 길이었다. 걸어서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서 그 높은 한계령을 넘을 수밖에 없었던 서민들의 삶의 애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무명 시인으로 활동한 정덕수 선생은 “한계령에서”라는 시를 썼다. 그는 강원도 양양 산골 오색에서 태어나 집안이 너무 가난해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생계를 위해 나무 지게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의 꿈을 접지 않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시를 썼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고향인 한계령을 보고 있을 때, 문득 주위의 산이 그의 마음에 다가와 그에게 울지 말라고 위로를 전해주는 소리를 듣고 시를 쓴 게 아닌가 싶다. 그에게 인생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리고 어린 시절 아픈 추억에 눈물이 났지만, 산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와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그 모든 상처를 그저 가슴에 묻고, 홀로되신 아버지를 위해 그저 바람처럼 살다 가라는 산의 소리를 그는 들은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그가 쓴 시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이 시가
“한계령”이라는 가요로 만들어졌고 애환 서린 양희은 씨의 목소리로 이 노래가 불러짐으로써 전 국민이 사랑하는 대중가요가 되었다. 이후 한계령이라는 노래는 거친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한계령에서>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 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히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8월 20일 수서역에서 오송 가는 SRT를 탔다. 청주에서 현길 아우를 만나 밤 10시 설악산을 향해 출발했다. 한계령에 도착한 건 밤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등산로는 아직 닫혀 있었고, 3시에 개방한다고 하여 차에서 잠시 쉬면서 눈을 붙였다. 새벽 3시가 되어 등산로가 개방이 되면서 바로 등반을 시작했다. 설악산의 최고봉인 대청봉까지는 약 8.5km 정도였다. 아직 주위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랜턴 하나에 의지해 산행을 시작했다. 한계령에서 대청봉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너무 험했다. 일반 등산로는 얼마 되지 않았고 중간에 각종 암석이 불규칙적으로 끝도 없이 계속되어 있어 야간 산행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직 몸도 풀리지 않아 험한 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완전히 깜깜한 상태로 2시간 30분 정도를 오르자 주위가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를 더 올라 대청봉에 도착하니 아침 7시 30분이었다.
대청봉은 해발 1,708m로 한라산 1,950m, 지리산 1,915m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 높은 산이다. 아마 우리나라에 있는 산 중에 대청봉을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져 있는 웅장한 기암괴석으로는 최고의 풍광이 아닌가 싶다. 다행인 것은 날씨가 조금 흐린 가운데서도 동쪽으로 동해가 보였다. 산 정상인 대청봉에서 바라본 세상은 너무나 작아 보였다. 속초에 있는 아파트 단지도 보였는데 성냥갑보다 작은 듯했다. 저렇게 작은 세상에서 우리는 아등바등 살고 있을 뿐이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듯한 세상인데, 그곳에서 우리는 미워하고, 다투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지나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인데 살아가고 있는 그 당시는 그러한 것들이 우리 눈에 그렇게 크게 보이니 삶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대청봉에서 내려와 봉정암으로 향했다. 봉정암으로 출발하기 시작할 때가 8시 무렵이었는데 이때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해서 우비를 입고 산행을 계속했다.
봉정암은 백담사의 부속 암자이다. 대표적인 불교 성지인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이며, 불교도들의 최고의 순례지로 유명하다. 대청봉에서 2km 정도 걸린다. 해발 1,244m에 위치하고 있는데 양쪽의 거대한 바위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그 웅장함에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봉황새가 산 정상에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봉정암(鳳頂痷)이라 이름 붙여진 듯하다. 봉정암은 완전히 외부로부터 분리된 듯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청봉에서 백담사로 가는 도중에 봉정암으로 가는 사잇길이 있었는데 완전히 가파른 돌멩이로만 이루어진 길로 쉽게 사람들이 다닐 수 없는 완전히 외진 곳이었다. 봉정암에 도착하니 9시 정도가 되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을 말한다. 적멸보궁은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향해 큰 창을 만들어 놓는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그곳에 있기에 별도의 불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 창을 통해 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참배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 선덕여왕 12년인 643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갔다 돌아올 때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처음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이 사리를 양산의 통도사, 오대산의 상원사, 설악산의 봉정암, 영월의 법흥사에 나누어 봉안하여 당시 4개의 적멸보궁이 생겼다. 그 후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왜군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약탈할 것을 염려하여 통도사에 있던 진신사리를 자신이 있던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임진왜란 이후 반은 통도사로 반은 정선의 정암사로 옮겨 적멸보궁이 5개가 된 것이다. 정선의 정암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온 자장율사가 열반에 들었던 곳이라서 서산대사가 그곳으로 진신사리 일부를 옮겨 보관하게 하였다. 물론 그 이후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다른 경로를 통해 들어와 현재에는 다른 사찰에도 모시고 있으나 자장율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가지고 들어온 진신사리가 의미가 있어 이 5대 적멸보궁을 불교계에서는 가장 소중히 생각한다.
봉정암에 도착해서 주위를 보니 정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쉽사리 올 수 있는 곳이 아닌 듯했다. 우선 대웅전을 가보았는데 예불 시간이었는지 몇 명의 신도들과 스님이 독경을 하고 있었다. 대웅전 안에서 정말 불상이 하나도 없었다. 대웅전 전면에는 완전한 통유리로 앞을 훤히 볼 수가 있었고, 이 유리를 통해 대웅전에 앉아서 바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사리탑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봉정암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기에 신라시대 원효, 보조 등 우리나라의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봉정암에서 30분 정도를 머물고 다시 대청봉 쪽으로 가서 한계령으로 하산을 해야 했다. 차를 한계령 휴게소에 주차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9시 30분 정도에 봉정암을 출발했는데 비가 더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니 멈출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고 하산할 때까지 계속 비가 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봉정암에서 한계령까지는 5시간 정도가 더 걸릴 텐데 하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점점 비는 더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비를 걸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비는 체온이 떨어지는 것만 예방할 수 있었고 내리는 비에 온몸이 다 젖어 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도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결국 윗옷과 바지는 물론 속옷까지 전부 젖어 물에 빠진 새앙쥐처럼 되어버렸다. 신발뿐만 아니라 양말까지 전부 물에 빠진 듯해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양말에서 물이 질컹질컹 새어 나왔다. 게다가 바람이 계속 심해지기 시작하면서 산속의 날씨는 마치 10월 말이 된 듯했다. 갑자기 온몸이 추위를 느끼게 되면서 몸이 으스스 떨려 왔다. 휴식을 취하면 체온이 더 내려갈 것 같아서 되도록 쉬지 않고 계속 산행을 했다. 이날 오전 8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우리가 한계령에 도착한 오후 3시까지 중간에 한 번도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계속되었고, 졸지에 7시간 이상을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해야만 했다.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길은 워낙 암석들이 중간에 너무 많이 계속되어 있어서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오히려 더 힘이 들었다. 예전에 교통사고로 다쳤던 무릎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면서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중엔 아예 다리가 풀리면서 자꾸 균형을 잃어 내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참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너무 힘이 들어서 아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5시간 이상을 걸어 한계령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차를 타고 청주로 향했다. 어머니께로부터 전화가 와서 빨리 집으로 가야 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니 저녁 7시였다. 어머니께서 원하는 일을 내가 처리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니 갑자기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허리와 다리가 쑤셔오기 시작하더니 몸이 무너져 내려버리고 말았다. 이날 내가 걸은 걸음은 정확하게 55,091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