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의 땅(조정래)
조정래 소설은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준다. 읽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학교 때 형이 태백산맥을 빌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1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10권을 다 읽기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소설 유형의 땅도 마음 한구석에 항상 남아 있었다.
태형이 곤장을 치는 형벌을 말한다면 유형은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형벌이다. 유형의 땅이란 유배를 보낸 곳, 즉 유배지를 의미할 것이다. 유형의 땅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운명적으로 너무 힘든 환경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온갖 곡절을 다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현실 그 자체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만석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비천한 신분으로 인한 한을 뼈저리게 느낀다. 주인 아들의 비인간적이고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의 아버지의 초주검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소작지마저 다 뺏기고 거리로 나앉게 된다. 만석은 이로 인해 증오와 분노에 치를 떨게 된다.
6.25로 인해 인민군이 그에게 가져다준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은 그가 주인 집안의 처절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는 사람 잡는 야수로 변해간다. 하지만 여맹에 가입한 그의 아내와 인민군 대장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 두 명을 그 자리에서 살해한다. 인민군 대장을 죽인 대가는 그의 부모와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전국을 떠도는 막노동꾼으로 30년을 지내다 만난 두 번째 아내마저 젊은 남자와 함께 그의 전 재산을 훔쳐 달아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아내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결국 병에 들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고아원에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평생을 유형의 땅이라는 그 시대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인간다운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만석은 그의 아버지가 극도로 가난했던 운명을 이기고 만석꾼이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었지만, 평생 그는 그 가난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주인에게 당한 아픔에 철저히 복수하지만, 그나 주인이나 시대만 바뀌었을 뿐 인간적으로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도 한 번쯤은 인생에서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 운명을 이길 힘이 없었다.
만석에게는 현실 그 자체가 형벌이었다. 현실이라는 그 유형의 땅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대를 선택할 수도 신분을 선택할 수도 없었던 사회는 어쩌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은 삶은 누구에게나 비슷할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삶이 나에게 수시로 다가오지만, 나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유형의 땅에서 항상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석의 아버지는 만석에게 말한다.
“시상은 참아감서 살아야 허는 것이여. 한을 험허게 풀먼 또 다른 한이 태이는 것이여. 안 되야, 안 되야, 지발 사람 상허게 말어”
현실이라는 유형의 땅에서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그의 삶이 바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