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이 멀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렇게 된다면 자동차나, 버스, 비행기 등 모든 교통수단들도 의미 없을 것이며, 현재의 모든 사회 문화 경제의 대부분이 혼돈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야생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에 문명이나 문화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모든 인간들이 시력을 잃게 되었을 경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무한한 상상력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러한 사회에서의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을 인간의 본능적 관점에서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인간이 시력을 잃는 것 하나로 인해 얼마나 그 존엄성이 무참하게 허물어져 내리는지, 그리고 인간의 내면의 본능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제 사라마구는 1922년 포르투갈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젊었을 때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7년 <죄악의 땅>이라는 작품을 발표했으나 이후 19년 동안 창작 활동을 중단한 채 공산당 활동에만 전념했다. 5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1982년 <수도원의 비망록>이라는 작품으로 당시 유럽 최고의 작가로 떠올랐다. 1998년 그는 포르투갈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사라마구의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일 것이다. 비록 그의 ‘만약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눈이 멀게 되고 오직 한 명만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는 특유한 가정이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의 상상력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가정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는 그 가정의 도움으로 인간의 진실된 본능을 충분히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려 깊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배반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온 도덕적 양심은 지금도 존재하고 또 전에도 늘 존재해왔다. 그것은 영혼이란 것이 혼란스러운 명제로 전락해버린 제사기의 철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사회도 진화하고 유전자도 바뀌면서, 우리의 양심은 결국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은 언제까지 자신의 양심을 지켜가며 도덕적, 윤리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는 눈이 멀게 되는 사회가 도래하기 시작하자 우리의 윤리나 양심은 한순간에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인간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것이었다.
“이제 곧 우리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야, 우리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사실 이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개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개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개는 냄새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또 상대방이 누군지도 확인하지. 여기 있는 우리도 색다른 종자의 개들과 같아, 우리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나 말로 서로를 알 뿐, 나머지, 얼룩 생김새나 눈이나 머리 색깔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
인간은 어쩌면 야생의 동물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구별하며 차별하게 된다. 이로 인해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며 이러한 문제는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은 동물들 사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결국 공포 때문에 미쳐버릴 거야, 의사는 생각했다. 이윽고 의사는 밑을 닦으려 했으나 휴지가 없었다. 손으로 뒤의 벽을 쓰다듬어보았다. 두루마리 화장지, 또는 화장지 걸이라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좋은 것은 없어도, 그래도 낡은 종이 조각들은 끼워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서글펐다. 자신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련하게 느껴졌다. 지저분한 바닥에 닿는 바지 자락을 추스르다가,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눈먼 병신, 눈먼 병신, 눈먼 병신,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단순히 눈이 멀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추락하고 나면 인간은 동물과 다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삶의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 그녀가 이 말을 자주 되풀이했기 때문에,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녀의 충고를 하나의 금언으로, 격언으로, 교리로, 생활 규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눈이 먼 세상에서 인간은 어쩌면 원시시대의 동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윤리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삶을 인간은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이성이 있기에 이를 극복해 내려 노력할 수 있다. 이성이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제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오늘부터는 우리가 음식을 맡겠다, 미리 경고해두는데, 아무도 음식을 찾으러 저 앞마당으로 나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입구에 경비를 세워둘 테니까, 누구든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우리는 책임을 못 진다, 이제부터 음식은 돈을 받고 팔겠다, 먹고 싶은 사람은 돈을 내라.”
모두가 눈이 멀어진 사회에서 부족한 식량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힘이 센 자가 힘이 약한 자를 짓밟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차지하겠다는 인간의 탐욕이 힘의 우열에 의해 결정되고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이다. 서로 협조를 하면 공평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니 짐승 같은 본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별되어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무자비하고 야만적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인간의 본능만이 존재하는 지옥에도 그 지옥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희망 또한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낙담하고 있는 지옥 같은 생활을 끝내기 위해 용기를 내는 자가 있었고 그 한 명의 힘으로 인해 그러한 악마들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는 눈이 멀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가 현재에도 눈이 먼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것을 정확하게 바라보지도 않고 자신의 프레임에 갇혀 세상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본다면 그 또한 눈을 뜨고 있지만 볼 수 없는 자와 마찬가지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인간의 추악한 본능이 지배를 한다. 하지만 현재 눈을 뜨고 있는 우리들의 지금 사회에도 인간의 더러운 본능이 더 많은 작용을 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이들이 진정으로 눈이 먼 자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는 것일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눈먼 자들처럼 인간의 추악한 본능으로 일상을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