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단함

by 지나온 시간들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2차 세계대전의 패망 후 독일 사회의 암울한 배경 속에서 한 가정과 그 주위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내 손이 지폐를 헤아리고, 분류하고, 동전을 쌓아 올리는 동안 아이들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어느 성당의 관청에서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내 남편의 월급은 320마르크 83페니히. 지폐는 방세로, 한 장은 전기료와 가스비로, 한 장은 의료 보험비로 떼어 놓고, 빵집에 갚을 돈을 제하고 나니, 내가 쓸 돈 240마르크가 남는다. 프레드는 내일 돌려준다는 쪽지를 보내 놓고 10마르크를 가져갔다. 그는 그 돈을 술 마시는 데 쓸 것이다.”


전후 가장 커다란 문제는 먹고 살아가기도 빠듯한 경제 사정이다.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경제적 상황은 삶을 암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그 어떤 삶의 다른 여유를 생각할 수조차 없다. 현실은 우리를 숨조차 쉬기 힘들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가끔 죽음을, 이승의 삶에서 저승의 삶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순간 내게 남아 있게 될 것을 상상해 본다. 아내의 창백한 얼굴, 고해실에서 본 신부의 빛나는 귀, 듣기 좋은 전례의 선율로 가득 찬 어스름한 성당에서 갖는 몇 차례의 차분한 미사, 아이들의 따스한 장밋빛 피부, 내 핏속을 돌아다니는 알코올, 아침 식사, 몇 번의 아침 식사, 그리고 커피 머신의 꼭지를 돌리는 소녀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녀도 남아 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삶이 고단하다 보면 죽음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힘들기에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시대가 만든 암울한 현실에서 그저 도피하고픈 마음뿐이다.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기에 우리는 죽음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삶은 그래서 슬프다.


“나는 물이 천천히 흘러나오는 수도꼭지 밑에 빈 양철통을 자꾸만 갖다 댄다. 내 시선이 거울 안쪽 뿌옇게 흐려져 가는 먼 곳을 빨아들인다. 내 두 아이의 몸이 빈대에 물려 부어오른 것과 몸에 생긴 이에 물린 자국이 보인다. 전쟁 때문에 생긴 엄청난 무리의 해충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난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수십억 마리의 이와 빈대, 모기와 벼룩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임을 알려주라는 말 없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가 버렸다. 삶의 희망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일까? 그 많은 역사의 흐름에서 전쟁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왜 인간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신은 이런 구역질 속에서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인 듯했다. 내 심장에 넘쳐흐르고 내 혈관을 가득 채우는 이 구역질이란 것이 피처럼 내 몸속을 돌아다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순간 프레드와 아이들이 떠올랐고, 어머니 얼굴이 보였고, 거울 속에서처럼 아이들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구역질의 홍수 속에 떠밀려 가버렸다. 그들 모두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신이라는 그 단어 말고는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울었다. 이런 단어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생각나지도 않았다. 뜨거운 눈물이 두 눈에서 얼굴 위로 마구 흘러내렸다.”


울고 싶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삶이 너무 고단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다. 시대가 사회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뭉개 버렸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삶은 진정 살아볼 만한 것일까?


“나는 광채를 발하는 부인의 끔찍한 눈초리를 보며 언젠가 들었던 허스키한 목소리의 흑인 영가가 그리워졌다. 딱 한 번 듣고 그 이후로 다시는 들을 수 없었던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생이기에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꿈꾸며 삶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삶의 고단함이 우리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KakaoTalk_20211110_195547730.jpg



작가의 이전글나를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