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은 독일의 단치히를 중심으로 바이마르 시대, 나치스 시대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세 살 때 성장이 멈추어버린 난쟁이 오스카의 삶을 통해 그 파란만장한 시대를 엿보고 있다.
이 소설은 당시를 살았던 소시민들의 모순과 부조리, 범죄와 성에 대한 사실을 하나도 숨김없이 거칠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삶에 대한 어떤 미화도 포장도 하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의 인간의 내면과 언행 모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진실성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회의 기회를 우리는 가질 수 있다.
귄터 그라스는 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 당시엔 독일의 단치히에서 식료품 집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2차 대전에 징집된다. 소년병이었던 그는 19세에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전쟁 포로가 된다. 그 후 광산에서 석공으로 일을 하다 뒤늦게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웠고 29세에 처음으로 시집을 냈고 31세에 <양철북>을 쓰면서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많은 소설을 남기며 199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이라는 소설에서 왜 오스카라는 세 살에서 성장이 멈춘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일까?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겠지만, 당시 독일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패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이후의 독일은 전과 변함이 없기에 독일 사회의 지극한 유아성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가면서 지속적으로 내면의 성장을 이루기도 하지만, 몸은 성장하나 어떤 유아기적 단계에서 내면의 성장을 멈추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발전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사람으로 모인 집합체인 사회지만 어떤 사회는 계속해서 성장을 이루어 가기도 하지만, 어떤 사회는 성장하지 못한 채 어린이와 같은 단계에서 머무르고 있기도 하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닌 여러 복합적인 것에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어떻든 성장하지 않는 사회의 책임은 변명의 여지없이 그 사회 일원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는 시대적 악의 대명사인 나치스 정권의 영향력이 어떻게 일상 생활에까지 스며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악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운 곳인 일상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이 악인지도 모른 채 나치스 정권을 무조건 따르는 일부 독일 국민들의 우매함이 가장 결정적인 근거다. 그 악의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악랄하고 비합리적이며 이해할 수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나치 정권에 줄을 맞추어 따라가며 “하일 히틀러(Helil Hitler, 히틀러 만세)”를 외치곤 한다. 지극히 유아적인 사회상의 현실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어느 부두 노동자가 말 대가리를 이용하여 뱀장어를 잡는데, 그 말 대가리의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 쏟아져 나오는 뱀장어를 보고 주인공 오스카의 엄마는 구토를 하게 되고 이에 더하여 오스카 아빠는 그 뱀장어를 돈을 주고 사서 엄마에게 억지로 그 뱀장어를 먹이게 한다. 그 강압에 못 이겨 오스카 엄마는 눈물을 삼키며 자신의 보기만 해도 구토를 했던 그 뱀장어들을 꾸역꾸역 먹게 된다. 사회의 악이 그렇게 일상에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다.
아무런 죄가 없는 착한 유대인의 장난감 상점을 죄의식 전혀 없이 부시고 뭉개 버리며 살인마저 하는 것은 악의 화신으로 변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소설에서는 주체를 못 하는 성에 대한 정욕 또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절제를 모른 채, 도덕적 윤리적 기준도 잊은 채 마치 동물들처럼 인간의 성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의 불륜과 나이건 상황이건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되는대로 뒤엉키는 성의 영역은 인간이 동물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세 살에서 성장이 멈춘 오스카가 두드리는 그 양철북의 소리가 기괴하고 듣기 싫은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의 역겨운 악에 리듬을 맞춘 채 성장하지 못하는 데 있다. 성장을 제대로 한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북을 두드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난쟁이 오스카가 두드리는 북소리는 어린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찢어질 듯한 양철북을 두드려 대기에 듣기가 괴로운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성장을 멈추는 순간 그는 계속해서 그 단계의 양철북을 두드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그 사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사회적 관습과 인습은 우리가 계속 두드리는 양철북과 같다. 나이가 들어도 예전의 모습과 같은 사람이라면 그 또한 그 단계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는 것이다. 계속해서 성장하는 개인이나 사회라야 비로소 장난감 같은 양철북이 아닌 정상적인 북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나는 매일매일을 나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일까? 혹시 나 자신이나 우리 사회는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러한 성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성장의 기회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