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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Nov 23. 2021

폭풍의 한가운데

 윈스턴 처칠은 1874년에 태어나 1900년 보수당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1904년 보수당의 보호관세 정책에 반대하면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이후 통상장관, 식민 장관, 해군 장관 등을 역임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에서 물러나지만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 1940년 영국 총리로 취임하면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 후 <2차 대전 회고록>, <폭풍의 한가운데> 등의 책을 썼고,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실질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건의 진행에 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된다. 지금까지 실제로 진행되어 온 역사와 그 안에서 자기가 맡았던 역할 등 모든 과거에 관한 사전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선택을 시도한다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피할 것인지가 명확해질 것이다. 이 경우 나는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진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결정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오류와 이어지는 환난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선택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한 선택으로 인해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했지만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선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후에도 나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생각으로 항상 열린 마음과 깨어있는 인식으로 삶을 꾸준히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나온 삶이 행복했고, 생기에 차 있었으며, 흥미진진한 것이었음은 틀림없지만, 그 힘들고 위험했던 길을 다시 한번 걸으라고 한다면 결단코 사양할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일련의 실수들과, 멋진 모험, 그리고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나를 따라다녔던 행운이, 새로운 인과의 숱한 사슬 중 어느 한 고리에서 잠적해 보이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우리 모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에 만족하고, 살아남아 있음에 모두에게 감사하자. 우리가 걸어온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자. 우리를 끊임없이 따라다닌 신비스러운 운명의 흐름을 이 세상, 이 공간, 이 순간에 꼭 있었어야만 할 필연적인 것들이었다고 인정해 주자. 기쁨은 소중히 간직하고 슬픔 앞에서는 울지 말자. 어둠이 없이 어찌 빛의 영광이 있을소냐? 삶은 총체적인 것, 선이든 악이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삶의 여로는 즐거웠고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만.”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도 많고 미련 있는 일도 많을 것이다. 과거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다시는 그러한 시간을 생각하기 싫기도 할 것이다. 


  다시 그 험한 세월을 살아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돌아가기 싫고, 후회되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누구의 삶이건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삶은 그래서 한 번으로 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렇게 눈치만 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대중 앞에 공언한 이야기라고 해서 죽을 때까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놈의 기억이라는 송장을 끌고 다닐 것인가? 스스로 자신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어찌할 것인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관된 고집은 소심한 자의 전유물이고 멍청한 정치인이나 성직자들이 매달리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당당히 주장하고, 내일 혹시 생각이 바뀌더라도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당당히 자신의 바뀐 소신을 피력하라.”


  이것은 처칠이 좋아했던 랄프 에머슨의 말이다. 처칠은 보수당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나중엔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꾼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최선의 결정이라 생각했다.


 살아가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자신의 생각과 현실은 너무나 다르게 변할 수 있다. 아집과 독선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는 융통성이 필요하기도 하다. 


   “저 눈부신 가을 햇빛 아래 행군하고 구보하던 얼마나 많은 영혼 위에 죽음의 사자가 그림자를 드리웠던가? 단순한 병사들에게는 때 이른 난폭한 죽음과 파멸, 죽음보다 더한 수모와 궁핍, 그리고 불구, 절망이, 지배자들에게는 자존심과 생계의 몰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만수천의 저 씩씩한 모습들 위로 잔인한 운명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지만 우리는 보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꽃다운 나이에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젊은 청년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전쟁으로 인해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그러한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것일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우연이란 것의 존재를 믿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사에 개입하는 이 전능한 요소가 단지 단순한 사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간단히 믿기가 어려워진다. 우연이나 행운, 숙명, 운명, 운수, 섭리와 같은 말들은 같은 내용을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삶 자체가 끊임없이 외부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고 느낀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인생을 십 년만 돌이켜 보더라도, 하잘것없는 작은 사건이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기억을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평상시와는 달리 전쟁이라는 삶의 격렬한 현장에서는, 우연이란 요소는 평소의 베일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매 순간 모든 사건의 직접적인 중재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기 생각이 항상 옳다고 여기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사고밖에 되지 않는다.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시간은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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