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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핵폭탄과 아인슈타인의 편지

by 지나온 시간들

1942년 8월 미국 뉴욕 맨해튼에 소재하고 있던 미 육군 지부에는 인류 최초로 원자로를 개발한 페르미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이 모임을 책임지고 있던 자는 당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밀 지령을 받은 미 육군 준장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였다. 루스벨트는 그로브스에게 영국과 캐나다의 지원 아래 핵에너지를 군사적으로 개발하라는 일급비밀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고 이에 그로보스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을 먼저 맨해튼으로 소집했었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인슈타인과 페르미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보낸 편지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상대론에서 유도된 질량 에너지 등가 원리가 만약 당시 발견되었던 핵분열에 응용이 된다면 무서운 군사적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이러한 무기를 먼저 손에 넣는다면 그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페르미 또한 핵물리학의 가장 뛰어난 전문가였고 무솔리니 독재 치하였던 이탈리아를 탈출했기에 이를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페르미는 아인슈타인이 가지고 있었던 위상과 신뢰도는 백악관에 있는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아인슈타인에게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자고 먼저 제안했다. 이에 공감한 아인슈타인은 페르미를 비롯한 다른 저명한 물리학자들까지 포함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는 1939년 10월 11일 백악관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다.

이 편지를 읽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 심각성을 곧바로 인식할 수 있었고, 히틀러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하여 곧장 핵에너지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위원회를 조직하라고 명령한다. 곧이어 미국의 육군과 해군은 1940년 이러한 프로젝트를 바로 출범시켰고 이에 따라 그로브스가 맨해튼에 물리학자들을 비밀리에 소집시켰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고 전공도 핵물리학이 아니었기에 실질적인 역할은 페르미가 적당하였지만, 그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있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 연구의 총책임을 맡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오펜하이머의 책임하에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에 새로 만들어진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극비리에 핵무기의 개발에 들어간다. 우선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를 빠른 시간에 성공시키기 위해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비밀리에 모이게 한다. 그들이 몸담고 있었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이유 없이 최고의 학자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소집된 물리학자는 핵분열 연쇄 반응으로 인류 최초로 원자로를 만들었던 엔리코 페르미를 비롯해, 1939년 태양의 핵융합 과정을 해결하였던 한스 베테, 핵붕괴 반응의 이론적 계산의 전문가였던 에드워드 텔러, 우라늄 238에서 우라늄 235를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한 윌러드 리비, 페르미와 함께 핵분열 연쇄 반응의 석학이었던 레오 실라드, 중수소를 발견하여 핵분열의 과정을 연구한 해럴드 유리, 그 외에도 훗날 미국의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로 성장하는 젊은 리차드 파인만과 줄리안 슈빙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이미 노벨상을 받았거나 훗날 받게 되는 천재 중의 천재들이었다.

페르미를 중심으로 그들은 일단 제어 가능하고 핵반응에 필요한 중성자를 계속 자급할 수 있는 연쇄 핵반응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비밀리에 이를 성공시킨다. 그런 후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는 약 5,500백만 평 규모의 비밀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폭탄에 사용할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 239의 정확한 양을 결정하는 계산에 성공하였고, 2년 만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의 핵분열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이 만들어 낸 폭탄은 길이 1.8m, 지름 60cm, 무게는 4톤이었으며 그 안에는 그들이 정확하게 계산한 플루토늄 239가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최초로 만든 핵폭탄이다.

이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밀 명령에 따라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공군 기지에서 실험하게 된다. 이 실험의 통제실은 폭탄으로부터 16km나 떨어진 위치에 있었고, 벙커와 엄폐물로 가려진 채 이를 개발한 연구진들은 그 폭발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한 이 최초의 핵폭탄의 주위에는 커다란 버섯구름이 피어올랐고 폭발 위치의 반경 수 km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으며 16km나 떨어진 통제실에 있던 사람들로 그 충격파로 인해 뒤로 나동그라졌다. 폭탄이 폭발한 장소에 있었던 철탑은 완전히 녹아 증발해 버렸으며, 사막이었던 그 주위의 모래는 모두 녹아 유리가 되어 버렸다.

이 실험이 성공한 후 3주 후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국의 B29 전폭기는 ‘리틀 보이’라는 핵폭탄을 히로시마 상공에서 떨어뜨린다. 이 리틀 보이는 지상에서 약 550m 상공에서 폭발하였고 히로시마 도시 전체의 3분의 2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으며, 히로시마 인구 35만 명 중 14만 명이 사망했다. 3일이 지난 8월 9일에는 또 다른 B29 전폭기가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하나를 더 떨어뜨렸고 27만 명 주민 중 7만 명이 사망했다. 일본은 6일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세계 2차 대전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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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그의 여생 동안 후회했다고 한다. 화합 결합의 본질을 해결해 195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2차 대전 후 핵무기 확산 운동을 전 세계적으로 벌여 1962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라이너스 폴링에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고 부추기는 편지에 서명한 것일세.” 아인슈타인은 다른 글에서도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섭고 극악무도한 무기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물리학자들은 죄책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책임감 때문에 평생 고통받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쓸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는 자신의 생각이 논리적이라 판단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인류의 적들이 우리보다 앞서 그 무기를 개발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신무기를 만들었다. 나치 추종자들의 정신 상태를 보건대 그들의 손에 그 무기가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파괴와 남아 있는 모든 세상이 노예가 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와 자유를 위한 투사로서, 인류 전체를 책임지는 수탁자로서 미국과 영국의 손에 그 무기를 전달했다.”

인류 최초의 핵폭탄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사용되었다. 그로 인해 세계 2차 대전은 끝이 났다. 전쟁은 비록 끝이 났지만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전 세계의 여기저기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있어서 전쟁은 잠시 끝날지는 모르나 평화는 오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이고 그 역사는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그 역사의 반복은 아마 인류가 지구 상에서 멸종될 때까지 계속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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