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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an 29. 2022

살아남았지만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아픔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백혈병을 극복한 술라이커 저우아드의 책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는 삶의 많은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녀의 소중한 자서전적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011년 5월 3일, 우리 집 자동 응답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생체검사 예비 결과가 나왔으니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부모님과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진료가 끝나고 의료진이 모두 퇴근한 뒤였다. 근무 시간이 지났기에 진료실에는 희미한 불빛만 켜져 있었다. 잡지꽂이와 초록색 벽을 가로질러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사가 대기실로 나와서 우리 곁에 앉더니 딱 잘라 말했다. ‘생체검사 결과, 제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병세가 밝혀졌습니다. 따님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입니다.’ 의사는 그 병명을 천천히 발음했다.”

술라이커는 프린스턴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인재였다. 이제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고, 좋은 직장에서 사회생활도 막 시작한 터였다. 게다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를 그녀가 느끼는 진정한 사랑인 윌도 만났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채 이제 그렇게 꿈꾸던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백혈병이라는 괴물이 그녀의 미래의 문 앞에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병에 관해 파악한 얼마 되지 않는 것들과, 빠른 시일 안에 파리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했다. 입원해서 화학요법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우리 집에,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니 이 방에 머물러야 했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아마도 2초, 아니 1초 정도였겠지만 내겐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통해 발소리와 찬장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리는 아직 이른 아침이었고, 윌은 침대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로 커피잔을 손에 든 채 우리 아파트 안을 서성이고 있을 터였다. ‘오늘 첫 뉴욕행 비행기를 탈게.’ 윌이 말했다.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갈 거야.’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술라이커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바로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겠다는 윌의 전화에 술라이커는 윌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고, 자신도 윌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있어 윌과의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백혈병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 되었다. 

“옆방의 여자 환자는 항상 잠들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침대에 웅크려 누운 모습만 언뜻언뜻 보였다. 어찌나 야위었는지 뼈만 남은 시체 같았고, 황달 기운이 도는 피부는 왁스처럼 번들거렸다. 십 대인 딸이 거의 매일 문병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병실 벽 너머에서 나직이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슬픔의 소리였다. 침대에서 나와 문밖을 내다보니 간호사들이 흐느끼는 십 대 여자아이를 위로하며 함께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 어머니의 시신이 실려 나갔고, 관리인이 와서 병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정오에는 다른 환자가 그곳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술라이커가 암 병동에 입원해 화학 치료를 받는 동안 그녀는 수많은 죽음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오래도록 병원 생활이 지속되면서 암 환자 친구도 사귀게 되고, 그들과 친해졌지만, 그 친한 친구들도 한 명씩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지 항상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엎드려 머리를 처박은 다음 한동안 숨을 꾹 참고 있었다. 그러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혈관이 터질 듯 격렬하게 울부짖었다. 윌을 향한, 친구들을 향한, 병에 방해받지 않고 바깥세상에서 직장을 구하고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것을 찾아갈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좌절과 질투가 담긴 절규였다. 내 삶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는데 다른 사람들의 삶은 이제 시작이라니, 말도 안 되게 불공평했다. 폐가 얼얼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 되자 울기를 멈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가에 있는 작은 나무 책상으로 가서 일기장을 펼쳐 적었다.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여기에 나는 갇혀 있다.’”

술라이커에게 행해진 항암치료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화학 치료는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그녀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세상을 원망하며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그녀의 삶은 여기서 끝나고 말 것인가? 이제 겨우 20년을 좀 더 살았을 뿐인데?

“나는 기도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내가 있는 이 병실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져 신과 협상을 시도했을까?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쇠약해진 두 다리가 버거운 듯 후들거렸다. 나는 일어나서 친구에게 선물 받은 야광 펜을 집어 들고 벽으로 다가갔다. 멋들어진 시나 유창한 선언문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게 있는 건 그저 단 하나의 단순하고 본능적인 욕구뿐이었다. ‘살게 해주세요’ 나는 작은 글씨로 벽에 갈겨썼다. 반쯤은 기도였고 반쯤은 간청이었다.”

그녀는 삶에 대해 너무나 간절했다. 진실로 너무나 살고 싶어 했다. 꿈꾸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고, 평생의 사랑을 만나 그 결실을 이룰 수가 있었다. 하지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 줄은 정말로 몰랐다. 이 모든 것과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녀는 두려웠다. 

그러한 절망 속에 한 줄이 희망이 찾아들었다.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골수이식 수술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녀의 남동생의 골수를 이식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생사는 아직 모른다. 이식 수술의 결과가 잘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수술은 끝났지만 다시 함암 치료를 장기간 해야 했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그 길을 그녀는 다시 고통스럽게 걸어가야 했다. 

“나는 항상 사랑은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사랑은 고통을 해소하고 삶의 잔인함도 견딜 만하거나 심지어 아름다운 것으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로 나를 쭉 떠받쳐 준 마음속 발판이 무너져 내렸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고 하지만 현실을 그러지 못했다. 백혈병 치료 도중 술라이커와 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기로 결정했지만, 술라이커의 수술을 위해 결혼식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동안 윌은 술라이커 곁에서 그녀를 간호하고 지켜주었다. 하지만 사랑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오로지 변하지 않는 사랑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는다. 사람이 변하듯, 사랑도 세월에 따라 변할 뿐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변하지 않을 사랑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건 결혼이라는 제도도 아니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만으로도 부족하다. 이타적인 사랑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녀는 나중에야 알았다. 결국 윌과 그녀는 서로에게 지쳐 헤어지게 된다. 가장 커다란 것을 잃어버린 술라이카는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만다.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내 최초의 회복 절차는 번제 의식이다. 나를 계속 윌과 묶어놓는 것들을 불태우고 싶다. 내 슬픔을 지져버리고 싶다. 과거는 활활 불사르고 새로운 터를 마련하고 싶다. 이렇게 해야만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파트에서 윌의 망령을 쫓아내기 위해 세이지를 몇 다발씩 태운다. 허공에 짙은 연기가 맴돈다. 익숙한 방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까지 가구를 재배치한다. 윌과 함께 찍은 사진을 모아 장롱 깊이 집어넣는다. 같이 샀던 이불을 쓰레기 배출구에 처박는다. 윌의 전화도 받지 않고 그의 전화번호를 삭제한다.”

오랫동안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그를 떠나보내고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고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케모포트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로 수십 가지 화학 약물과 항생제, 줄기세포, 면역 글로블린, 수혈 팩이 주입된 내 몸의 입구였다. 아마도 이 의사는 수술 환자에게 똑같은 농담을 수십 번도 더 했으리라. 재미없는 농담인 것과는 별개로, 이 순간이 일종의 공식 추방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나를 건강의 왕국으로 확실히 돌려보내 줄 최종 절차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녀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그 오랜 기간의 병마와의 투쟁 끝에 이제 그 병에서 회복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다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사랑도, 직장도,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삶도, 하지만 그녀는 대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새로 얻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태어난 아기처럼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뼈저린 아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뒤로한 채 그녀는 새로운 길에서 다시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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