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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Feb 13. 2022

석가와 예수의 대화

역사적으로 볼 때 그동안 우리 인류의 종교 간에는 서로 비난과 다툼이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왔다.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자신의 종교만을 절대화하며 그 외의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던 경우가 너무나 흔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십자군 전쟁’이 될 것이다. 200여 년에 걸친 그 종교 간의 전쟁에서 무고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였던 것일까? 다툼보다는 화해가 종교의 더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아닌 것인가? 인간이건 종교이건 다른 존재를 배제시키고 자신을 절대화하게 되면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캐린 듄의 <석가와 예수의 대화>는 인류의 가장 대표적이며 보편적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그 자체로서 존중하고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한 책이다.


  흔히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와 다를 경우 타 종교를 이단이라 취급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이 다르다고 하여 다른 종교를 멀리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랑이며 불교가 말하는 자비인 것일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 2:3~5)”.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그러한 마음을 품으라는 뜻인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리자야, 사리자는 반드시 사람들을 좋은 사람, 싫은 사람, 옳은 사람, 그른 사람으로 구분하면 안 된다. 이른바 음식과 재물을 베풀 때, 지식과 지혜를 베풀 때, 평화와 위안을 베풀 때는, 상대에 대한 사리자의 느낌, 사리자의 생각, 사리자의 판단을 지워야 한다. (금강경, 방편과 자비)”


  만약 종교마저 배타적이라면 인간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다툼이 계속된다면 결국 같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네 자신을 완전히 슬픔에 항복시킴으로써 너는 네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석가는 자아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항복의 기술을 가르친 스승이다. 너는 석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캐린 듄의 책에서 예수는 제자인 시몬에게 석가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석가가 말하는 고통의 원인이 자신으로부터 말미암기 때문에 자신을 내려놓음으로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에 이러한 것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항복이란 단어로 번역을 하였는데 항복보다는 내려놓음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필립아, 네가 지금 한 말은 바로 석가가 줄 수 있는 것이 너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구나. 네게 석가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네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석가가 내 입으로부터 지금까지 듣지 못한 진리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는 잘못된 확신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나로부터 떼어가고 내가 틀리다는 것을 증명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느냐?”


  예수는 석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그의 제자 필립을 꾸짖는다.

  “너희의 마음의 문을 새로운 경험을 향하여 활짝 열고서 그 경험이 너희의 의식 속에서 완성되게 하여라. 너희의 마음을 너희에게 그들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위대한 나그네들에게 열어라. 그들과 대화함으로써 너희의 의심과 주저함을 솔직하게 표현해라. 너희가 진심으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진심으로 너희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어떻게 빛이 성장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받을 성령은 너희를 편협하고 분파적인 세계에 가두어 놓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의 독특성을 파괴하지 않고 도리어 저마다 다른 세계의 교제를 통하여 그들의 경계선을 극복하게 해 주는 성령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예전에 옳다고 확신하여 내린 결정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최선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그렇게 결정했지만, 돌아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많이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두 방법이 똑같군요. 나는 내 치료 방법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이 토론을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당신과 나 사이에 차이점보다는 더욱 중요할지도 모르는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치료 방법의 근본적인 주장인 사랑의 선물은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내 치료 방법의 근본적인 주장인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도 절대로 실패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모두 삶의 실패할 수 없는 근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거나 관철시키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오직 인간을 위함이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점이 많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당신이야말로 진실로 내 마음의 아들입니다. 당신만큼 내 절반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증거로서 나는 당신에게 승복과 탁발을 증정합니다.”


  예수와 석가는 끊임없는 대화 속에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며 같은 길을 가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기념하여 석가는 예수에게 불교의 상징인 승복과 탁발을 선물한다.


 모든 존재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얽매여 구속될 뿐 진정한 자유는 얻기 힘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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