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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Mar 25. 2022

왜 도망치듯 떠났을까? (유희, 이양지)

우리는 태어난 곳에서 계속 살아가기도 하지만,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진정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양지의 <유희>는 서울로 공부하러 온 재일 동포 여학생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제10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유희는 일본인이었을까? 한국인이었을까?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재일 동포였을까?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인들에 의해 소외감을 느꼈고, 부모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이었기에 한국으로 유학을 왔지만, 그녀는 한국인도 아니었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일은 끝내야지. ‘우리 나라’라고 쓸 수 없어요. 이번 시험이 이런 위선의 마지막이고,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세 국어의 훈민정음 시험이었어요. 답안지를 써 나가고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 나라’라고 쓰는 부분까지 가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어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손이 얼어붙은 것처럼 전혀 쓸 수가 없는 거예요. 답안지의 문장은 모두 머리 속에 들어 있었고, 그 네 글자만 쓰면 다음을 쓸 수 있었는데도 쓰질 못했어요. 손이 움직이지 않거든요. 본국 학생들은 술술 답안지를 메워나갔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쓰러질 것 같았죠. 나는 썼어요. 누구에게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누구에겐지 아첨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 ‘우리 나라’라고 썼어요. 나는 문장 안에서 네 번이나 똑같은 말을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썼어요. 거짓말쟁이, 알랑방귀만 뀌는구나 그 누군가에게 언제 그런 소리를 들을까 겁에 질린 채 답안지를 썼어요.”


  그녀에게 있어 ‘우리 나라’는 과연 어디였을까? 한국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이었을까?


  단지 국가만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여러 많은 것들이 나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람은 어디엔가에 속해야 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는 없다. 물론 숲 속 깊은 곳 자연으로 돌아가 홀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것도 완벽한 삶은 아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유희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10여 년 이상 미국과 유럽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나는 결코 그 나라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유희가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듯이, 나도 외국에서 도망쳐 내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양지 소설의 주인공 유희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픔과 어려움이 남의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 


  가장 전통을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중 몇 안 되는 한국계 일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쓴 이양지씨도 37살이라는 나이에 이생을 떠났다. 그녀가 그렇게 삶을 마감한 것도 유희가 서울을 도망치듯 떠난 것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몰랐던 그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녀는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끝냈던 것일까?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고 답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도 않았을 터인데 왜 그녀는 그렇게 떠나야만 했던 것일까? 유희의 아픔은 이양지씨의 아픔이었고, 또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아픔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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