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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Apr 20. 2022

삶의 환희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삶의 의미는 나라는 존재의 있음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 존재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환희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은 벅이라는 개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단순히 개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으로만 읽기에는 너무 부족할 듯하다. 벅을 사람 또는 나라고 대입하여 이 소설을 읽는다면 삶의 진실된 또 다른 면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벅은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길든 것은 아니었다. 벅은 곤봉을 든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 살면서 그 교훈을 다시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곤봉은 하나의 계시였다. 그것은 그가 원시법의 세계로 입문하는 첫걸음으로, 그는 이미 반쯤 그 길로 들어섰다. 삶의 실상에는 좀 더 광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벅은 겁먹지 않고 그런 것에 직면하면서 그의 본성이 각성시킨 온갖 잠재된 재간을 동원해 맞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개들이 상자에 갇혀 혹은 밧줄에 끌려, 어떤 개들은 온순하게, 어떤 개들은 벅처럼 분노로 으르렁대며 모여들었다. 그는 하나둘씩 붉은 스웨터 입은 사내의 의식을 통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잔인한 수행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벅의 뼛속 깊이 교훈이 스며들었다. 곤봉을 든 사내는 입법자였고 반드시 화해할 필요는 없지만 복종해야 할 주인이었다.”


  벅이 판사의 집에서 살아오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에게는 그를 아껴주는 주인이 있었고, 먹을 것에 대해 걱정도 없었으며, 따뜻한 잠자리에서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은 항상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벅이 판사의 집을 떠나 썰매를 끌어야 하는 위치에 이르렀을 때 그의 삶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해야 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은 절대로 안 되는 불가능한 것이 삶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주인은 벅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가 감당해야 하는 매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벅은 그의 한계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새로운 주인에게 복종했고, 삶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판사 댁에서 늘 그랬듯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자 페로와 프랑수아는 그에게 욕설을 해 대며 요리 기구들을 집어 던졌다. 그는 깜짝 놀라 허겁지겁 정신을 차리고는 수치심을 느끼며 추운 바깥으로 도망쳤다. 쌀쌀한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어깨의 상처에 독을 바른 듯 통증이 몰려왔다. 그는 눈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곧 찬 기운이 몰려들어 발끝까지 온몸을 떨었다. 버림받은 듯 느끼며 비참해진 그는 텐트 사이를 누비고 다녔으나 어느 곳이나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벅은 판사 집을 떠나 새로운 주인들을 여러 명 만난다. 그가 맞은 새로운 첫 주인은 벅에게 너무나도 냉정했다. 영하 50도 정도의 혹한에서도 밖에서 자도록 했다. 벅은 버림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삶의 고통과 괴로움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첫 도둑질은 살아남기 힘든 북극에서 벅이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증표였다. 환경 변화에 순응할 수 있는 그의 적응력을 암시했는데 그것이 없으면 곧바로 끔짝한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한 걸음 나아가 그의 도덕성이 마모되고 붕괴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생존경쟁이라는 무자비한 투쟁에서 도덕성은 허영에 불과하고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감정과 재산을 존중하는 것은 사랑과 동포애의 법이 발휘되는 남부에서나 가능했다. 그러나 곤봉과 송곳니가 지배하는 북극에서 그런 것을 지키는 놈은 바보였고 그러다가는 살아남지 못했다.”


  벅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존이 우선이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관념도 넘어서야 했다. 


  어떠한 환경이 주어지건 그것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택하더라도 살아남아야 그다음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머리 위에서는 북극광이 차갑게 빛나고 별들이 춤을 추다 얼어붙고 대지가 눈의 휘장 속에서 무감각하게 얼어 버릴 때 에스키모개들의 노래는 어쩌면 삶에 대한 유일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길게 끄는 울음소리와 반쯤 흐느끼는 듯한 구슬픈 소리는 생존의 고뇌를 표현한 삶의 애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래된 노래, 개 종족만큼이나 오래된 노랫소리로, 슬픈 노래만 있었던 때 묻지 않은 세상의 태곳적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에 수많은 세대의 슬픔이 담겨 있어 그 비애에 벅의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신음하며 흐느낄 때 그 속에는 오래된 삶의 고뇌, 야생의 조상들이 지녔던 고뇌가 있었고, 그들에게 공포와 신비를 던진 바로 그 추위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벅이 그 소리에 그토록 끌린다는 것은 그가 문명의 상징인 불과 지붕의 세대를 거슬러 울음의 시대였던 거친 태초의 삶으로 완전히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곳은 내가 정말 있어야 하는 자리인 걸까?


  벅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현재 이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어떠한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그가 진정으로 존재해야 하는 자리를 알고 싶었다. 


  “삶에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 환희가 있다. 그런 것이 살아 있음의 역설이다. 그 환희는 살아있기에 찾아오지만 살아 있음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야 찾아온다. 그 환희, 살아 있음의 망각은 감흥의 불꽃 속에서 자아를 잊는 예술가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싸움터에서 전쟁에 미쳐 자아를 잊고 생존을 거부하는 군인에게 찾아온다. 달빛 속에서 번개처럼 앞질러 가는 살아 있는 먹이를 잡기 위해 늑대의 오래된 울음소리를 내며 앞장서서 달려가는 벅에게도 바로 그 환희가 찾아왔다. 그는 시간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며 본성, 자신보다 더 깊은 본성의 일부, 그 심오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순수하게 솟구치는 삶과 조수처럼 밀려드는 존재의 파도, 근육과 관절과 심줄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 느껴지는 완벽한 기쁨에 압도당했다. 솟구치는 삶은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는데, 맹렬히 불타오르며 움직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냈고 별 아래, 움직이지 않는 죽은 물질의 표면 위로 환호하면서 날았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경험하면서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파란만장한 삶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모든 삶의 순간들은 우리가 느끼는 삶의 환희의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기쁨의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한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환희의 순간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함이 마땅하다. 언제라도 지금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용기를 가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나가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벅은 판사의 아들과 사냥하거나 산책할 때 업무상 동업자였고 판사의 손자와 놀 때는 어엿한 보호자였고, 판사와 함께 있을 때는 견고하고 위엄 있는 우정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열병처럼 타오르는 흠모, 미칠 듯이 광적인 사랑은 손턴만이 불러일으킨 감정이었다. 벅의 생명을 구해 낸 그 사내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게다가 손턴은 이상적인 주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개를 의무감에서 일의 편의를 위해서 돌봐 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마치 자식을 돌보듯이, 그렇게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듯이, 벅을 돌봐 주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친절한 인사와 즐거운 말을 잊지 않았고 앉아서 개들과 긴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는 곧 개들의 기쁨이자 그 자신의 기쁨이었다.”


  벅의 목숨을 구해준 손턴은 벅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벅은 그의 모든 것을 손턴을 위해 바칠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일들이 손턴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의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피츠에게서, 경찰견이나 우편견의 대장들에게서 교훈을 얻었는데 그것은 중간노선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지배자가 되든 지배를 받든 둘 중 하나였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나약한 행동이었다. 원시적 삶에서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비는 공포로 오해받았고 그런 오해는 죽음을 불렀다. 죽이느냐 죽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이것이 유일한 법이었다.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벅은 이 법칙에 복종했다.”


  삶은 확실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러한 선택은 의미가 없다. 나의 존재 이유를 확실히 알려주는 그러한 선택이 현명하다. 


  삶이라는 현실은 지배를 당하느냐, 지배하느냐의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한 것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의 삶을 결정한다. 벅은 지배하는 자리를 선택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강해져야만 했다. 벅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 목표를 달성했고,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개들을 지배했다. 비로소 그의 삶은 이제 다른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단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이 그림자들이 벅에게 너무나 강력하게 명령해서 인간과 인간의 요구들은 날마다 그에게 멀어졌다. 숲속 깊은 곳에서 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비롭게 떨리고 유혹하는 소리를 자주 들은 벅은 모닥불과 그 주변의 다져진 흙에서 등을 돌려 숲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왜 들리는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야성의 부름은 계속되었다. 숲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리는 절체절명의 소리였기에 그는 어디로 그리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부드럽고 매끄러운 흙과 초록빛 그늘을 자주 접하면서 손턴에 대한 사랑이 크니 벅은 다시 불 가로 돌아섰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게 된 벅, 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손턴이 있었기에 벅은 그의 곁에 아직은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소중한 존재는 그만큼 삶에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존재를 위해 우리의 삶은 채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밤이 찾아오자 벅은 연못가에 앉아 침울하게 손턴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때 숲속에서 이해츠 족과는 다른 어떤 생물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고 그는 귀를 쫑긋했다. 그는 일어서서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멀리서 날카롭게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공중으로 퍼져 나갔고, 곧이어 비슷하게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일제히 들렸다. 조금 있으니 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커졌다. 다시 한번 벅은 그 소리가 기억 속에서 끈질기게 들려왔던 다른 세상의 부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좀 더 주의 깊게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부름, 여러 곡조가 합쳐진 부름이었고 어느 때보다 더 유혹적이고 절실하게 울려 퍼졌다. 처음으로 그는 부름에 복종할 준비가 되었다. 손턴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를 묶어 놓았던 마지막 끈이 끊어진 것이다. 인간 그리고 인간의 어떤 요구도 그를 더 이상 묶어 놓지 못했다.”


  벅은 가장 사랑하는 손턴을 잃었다. 손턴만이 벅에게는 지금의 자리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였건만, 불의의 사고로 벅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렸다. 벅은 손턴을 잃은 것이 너무나 슬펐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해 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벅은 이제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잃었기에, 새로운 자리, 그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야만 하는 시간이 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 한 채, 새로운 공간,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인, 야성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벅은 삶의 진정한 환희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곳에서 그렇게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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