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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22. 2022

그대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가?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향은 그저 이상향일 뿐이다. 현실은 유토피아가 아니기에 디스토피아일까? 아니면 유토피아를 꿈꾸기에 디스토피아일까? 유토피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의 <훈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우리의 현실을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할 필요를 생각하게 해 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지난 몇 해 동안 하루라도 깊이, 죽은 듯이 잠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초죽음이 될 때까지 야근과 밤샘을 반복해야 하는 감사 시즌이 닥쳐오고 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상황이 더 나빠졌고, 그 여자의 아들은 지금 혼자서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그 여자가 지금 느끼는 고통을 다 설명할 수 없다.”


  훈자는 지리적으로 인도의 북서부 파키스탄의 잠무카슈미르에 있는 곳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런 곳일까?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있을까?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일까? 우리는 왜 훈자라는 유토피아를 생각하는 것일까?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현실은 어쩌면 유토피아가 될 수 없는 곳임에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훈자를 가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비록 그곳이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그런 곳에 가볼 수 있음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기에 그런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디스토피아를 어쨌든 벗어나고 싶기에 그런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젊은 아동 상담사는 심각한 표정을 건너다보며, 애써 담담하게 그 여자는 설명했다. 좀 더 많은 시간 아이를 돌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육아를 책임질 수도, 정서적으로 돌볼 수도 없는 남편의 성격에 대해. 상담사는 그 여자의 고백에 전적으로 – 직업적으로 – 공감했고, 더 이상 양쪽 가계의 정신병력을 물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다. 대신 세 가지 해결책을 그 여자에게 주었다. 첫째, 아이를 돌봐줄 제삼의 조력자를 찾는 것. 둘째,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근심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셋째, 그 여자의 남편을 자신에게 보내 상담받게 하는 것. 덧붙일 것 없이 분명한 그 답들을 받아 들고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이 버겁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음 편하게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우리는 얼마나 행복을 느끼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인가부터, 수면 부족 때문에 실제보다 표면이 건조하고 거칠어 보이는 사물들 위로, 결코 훈자일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이 훈자라는 것을 오직 그 여자만 알 수 있는 것들, 그것이 왜 훈자인지 누구에게도,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훈자를 꿈꾸지 않았다. 희망은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꿈은 단지 꿈일 뿐 깨어나고 나면 허무할 뿐이다. 삶은 그저 받아들임으로 족하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갈 수 있는 훈자, 즉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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