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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n 23. 2022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기에 더 소중했던 걸까?

사랑이었지만, 분명히 마음속에 가득히 존재했었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랑은 떠나가 버리고,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그토록 소중히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일까?


  한강의 <파란 돌>은 순수했던 시절, 마음 가득히 다가온 사랑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해 두 번 부르게 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 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 채, 갑자기 다가왔던 사랑이었다. 마음 한가득, 모든 것을 꽉 채워버린 운명 같은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이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 것일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인 걸까? 왠지 그 사랑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슨 연유인 것일까?


  “왜 그 순간 선명하게 떠올랐던 걸까요. 작업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당신의 뒷모습이. 긴 듯하던 머리칼과 좁은 어깨, 늘 먹 자국이 번져 있던 낡은 면바지가. 당신의 뒤통수에 피가 고여 있었다고, 5천이 채 되지 않는 혈소판 수치 때문에 피를 뽑아내는 시술도 받지 못했다고, 사흘 만에 학교에 나타난 친구는 입술을 물었었습니다. 그래서, 라고 나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너 바보야? 뒤통수에 피가 고여 있었대. 작은 우유팩 하나만큼 고여 있었다구. 내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갔을 때 이미. 친구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나는 멍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계속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떠나가 버릴 줄은 몰랐다. 함께 한 시간도, 같이 했던 일들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추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도 별로 없었는데, 너는 왜 그리도 일찍 떠나가 버린 것일까? 남아 있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어떻게 살아가라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렇게 혼자서 가버리고 말았던 것인가?


  “그렇게 몸서리치며 깨고 나면 아이의 이불을 덮어주고, 덩어리져 스멀거리는 어둠의 틈과 마디들을 헤아리며 잠을 청합니다. 그러다 가끔은 당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문밖으로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려오던 그 오후, 두려워하는 두 입술이 만나던 순간을. 두 사람 모두 입술을 벌리지도 못한 채, 서로의 부드러움이 떠날 것이 두려워 뛰는 심장들을 맞붙이고 있었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입맞춤 이후, 나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더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흥분과도, 무아경의 희열과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나이만 먹은 소년이었던 당신의 겁먹은 손이 숨죽이며 내 뺨에 머물렀던 순간을.”


  너는 아직 내 마음속에 남아 있지만,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서 새로운 시간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아마 착각이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너를 무엇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떠난 줄 알았는데 떠난 게 아니었다. 잊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간순간, 퍼뜩퍼뜩, 다가오는 너의 모습이 나의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아직도 너를 그리워한다. 


  이제 너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란 마음을 접으려 한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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