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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Jul 22. 2022

운명의 바닥에서

우리는 타인의 잘못에는 예민한 반면에 자신의 잘못에는 너그럽거나 아예 모르는 경향이 있다. 이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경우 북한이 동해에서 납북한 것에는 엄청난 비난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세계 2차 대전에서 한 것에는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이러한 잘못된 편견과 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건배를 권했다. 이해해주어서 고맙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맑고 순한 사케를 입에 다 털어놓고 다시 한 잔을 받아 호기롭게 입에 대는 순간, 몇 년 전 내가 찾아갔던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거주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시덤불 같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 무렵 힘겹게 책장을 넘기던 기록들도 떠올라왔다.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술기운 때문이었다고 해도 좋고, 오로지 술기운 때문이었다고 해도 아무 상관은 없다. 갑자기 선명하게 빨간색을 띤 싱싱한 말 사시미를 씹을 수가 없었고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일본은 북한이 일본인을 동해상에서 납치해간 것을 엄청난 폭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이 2차 대전 중 수많은 한국인, 중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자신의 전쟁에 끌고 간 것을 비교해 본다면 어느 쪽이 더 커다란 폭력을 행사한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해주던 주인집 아들이 나를 강간하려 해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하며 겨우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부산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몇 명의 일본 군인들이 나타났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과 눈을 틀어막힌 채로 군용 트럭에 실렸다. 당시 나는 열네 살이었다. 위안소에 군인들이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졸병, 장교가 섞여 왔다. 하루에 상대한 군인의 수는 삼사십 명쯤 되었으나 공일날에는 군인들이 팬티만 입고 밖에 줄을 서 있을 정도로 많았다. 어떤 사람은 팬티까지 벗고 다른 사람이 하는 도중에 커튼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다. 조금만 시간을 끌면 문밖에서 안에다 대고 ‘하야쿠, 햐야쿠(빨리, 빨리)’라고 외치기도 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은 죽을 둥 살 둥 힘을 다해 하고, 어떤 사람은 울면서 하기도 했다. 자궁이 붓고 피고름이 나와 일을 할 수 없던 어느 날, 한 장교가 와서 일을 못하겠거든 대신 자신의 성기를 빨라고 했다. 나는 ‘네 똥을 먹으면 먹었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더니 마구 때리고 던지고 해서 나는 기절했다 깨어나니 사흘이 지났다고 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행한 전쟁 범죄를 진정 알고는 있는가?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죽게 만들고 어린 소녀들에게까지 한 만행들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남의 잘못을 비난할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살았느냐고 당신은 내게 여러 번 물었지요? 죽고 싶지 않았느냐고 당신은 여러 번 물었지요? 아니요, 죽겠다, 하는 생각은 했지만 신기하게도 죽고 싶지는 않았아요. 그 말 알아요? 아우슈비츠에서 자살한 사람보다 지금 도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 그런데 어떻게 살았느냐?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죠. 아이들이 태어났고 저 아이들을 위해서 살자, 일본에 돌아갈 꿈을 포기하자. 아니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운명이 내 맘대로 내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돼야 한다는 집착을 버린 거죠. 그래서 살 수 있었어요”


  우리들의 운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릴 수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것이 통째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한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운명이 어떠한 모습이건 간에, 국가이건, 폭력이건, 배신이건, 전쟁이건, 우리는 그 어떠한 운명 앞에서도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희망이 절망적인 유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는 몰랐다. 풍랑을 만난 배가 물결을 헤치고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듯이 온몸으로, 온몸으로 물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행이라는 것이 생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우리는 늪 같은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하여 어떤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과거의 어리석음이 고름처럼 악취를 풍기는 인생의 어떤 해안에 서 있는 것이다. 운명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들 앞으로 너무도 다양한 방식의 불행을 동원해, 잔혹하고도 정확한 조준을 하며 각개 약진해오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운명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다. 그것을 차라리 빨리 인정하는 것이 삶의 지혜일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계속해서 희망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리석음을 깨달을 때까지 그렇게 힘들게 저항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저 밑바닥 끝까지 가보기 전에 운명의 힘을 깨닫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어차피 나의 힘으로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그 바닥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삶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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