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와 노을

by 지나온 시간들

“나는 해 지는 걸 보는 게 좋아. 함께 보러 가자.”

그런데 네 조그마한 별에서는 의자를 조금 옆으로 옮기기만 해도 가능하다. 어스름한 석양빛이 보고 싶어질 때마다 너는 그렇게 했겠지.

“어느 날은 태양이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본 적이 있어!”

조금만 있다가 너는 이렇게 덧붙였다.

“있잖아. 사람은 너무 슬플 때 해지는 걸 보고 싶거든...”

“태양이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본 날 그렇게 슬펐던 거야?”

어린 왕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는 자신이 사는 별 B612호에서 마음이 적적할 때 의자를 조금씩 뒤로 옮겨가며 하루에도 마흔네 번 노을을 보았습니다. 어린 왕자는 왜 그리 오래도록 노을을 보았던 것일까요?


제주 애월에서 노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해변을 거닐던 중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닷가에 앉아 한참이나 그 장면을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카메라에 담을 수도 없는 대자연의 모습이었습니다. 수평선 너머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아쉬움에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완전하고 영원할 것 같은 태양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정말 보잘것이 없고 별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큰일이라고 해도 대자연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을지 모르나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마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태양이 사라진 애월 바닷가는 이미 어두웠습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나면 내일 아침 태양은 다시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아마 노을을 바라보며 자신의 외로움과 그대로 마주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완전하고 영원할 것 같은 붉은 태양도 서서히 사라져 가는데, B612호라는 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러한 거대한 자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왕자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그 별에서 자신을 사랑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힘들면 노을을 바라보고,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며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하루가 어쩌면 힘들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하루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을 피하지 말고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왕자가 홀로 사는 그 별에서 외로움을 마주한 것 같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들과 부딪히다 보면 오늘 하루는 끝이 나고 저녁 무렵 다시 서쪽 하늘에 펼쳐진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노을을 바라보며 나의 외로움을 달래고 나면 내일 아침 또 다른 찬란한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알기에 어린 왕자의 노을이 나의 노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입니다. 수평선 너머로 태양은 사라졌지만, 내가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태양은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다시 태양은 나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주니까요. 어린 왕자는 노을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사실에 그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소중한 오늘은 존재하고 있으니 어린 왕자는 B612호 별에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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