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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Sep 23. 2022

버리지 못하고

 일을 하다 방 안을 둘러보니 갑자기 공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 산 책을 꽂으려 해도 자리가 없기에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일부라도 버리기 위해 오래된 책부터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볼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누렇게 변색이 되어 버린 책들을 꺼내 쌓았습니다. 그중에는 30년이 넘은 책들도 있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느라 그동안 고생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세월 수없이 이사하는 동안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오래도록 가지고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삿짐 아저씨들이 오래된 것들이 왜 이리 많냐고 속으로 많이 욕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장 오래된 책들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 한 무더기나 되었습니다. 그곳에 최근에 싼 책을 꽂아보니 깔끔하고 산뜻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책꽂이를 정리하고 나서 버리려고 쌓은 책을 들고나가려 했는데, 막상 망설여졌습니다. 미련이 남았던 것인지 그 오랜 책을 펼쳐보았습니다. 누렇게 변한 종이가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책 안에 쓰여 있던 글씨가 눈에 들어와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그 글씨를 보니 오래전 대학을 다닐 때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버리려던 다른 책도 펼쳐보니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으로 볼 책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고,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짐만 되는 것을 잘 아는데도 결국 버리지 못했습니다. 버리려고 쌓은 책들을 다시 빈자리를 찾아 꽂아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자, 안 보더라도, 필요가 없더라고, 짐이 되더라도 내가 죽고 나면 누군가는 버리겠지 하는 생각으로 구석 자리라도 만들어 꽂았습니다. 


<버리지 못한다>   

  

              김행숙  

   

얘야, 구닥다리 살림살이

산뜻한 새것으로 바꿔보라지만

이야기가 담겨 있어 버릴 수가 없구나

네 돌날 백설기 찌던 시루와 채반

빛바랜 추억으로 남아있고

투박한 접시의 어설픈 요리들, 

신접살림 꾸리며 사 모은 스테인리스 양동이

어찌 옛날을 쉽게 버리랴

어린 시절 친구들이 그립다

코흘리개 맨발의 가난한 시절

양지쪽 흙마당의 웃음소리     


오늘이 끝인 양 마침표 찍고

내일부터 새 목숨 살아갈 순 없지

유유한 강물로 흐르면서

지난날은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것

한 번 맺은 인연도 끊을 수 없는 거란다.   

  

  생각으로는 버리고 싶지만, 마음으로는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나에게 온 것은 그만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기에 스스로 떠나가지 않는 한 오래도록 간직하려고 합니다. 비록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더라도 그동안 함께 했기에 남은 시간도 같이 하려고 합니다. 오래된 것이 문제가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에는 그 오랜 세월 함께한 나의 존재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구석에 꽂혀있는 누런 책들을 가끔이라도 꺼내 볼까 합니다. 갑자기 그 오랜 책이 나에게 미소 짓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펼쳐보니 아마 행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나도 누렇게 변한 그 오래된 책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인연은 그래서 소중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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