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일요일이면 그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가봤자 뻔한 곳이었지만 그렇게 함께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갈 곳도 별로 없었지만 그래서 매주 비슷한 곳을 다녔어도 한 번도 지루한 느낌을 가졌던 적은 없었습니다. 단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중고등학교에 갔고 대학이라는 이름에 빠져 일요일 그 즐거웠던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정신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각자의 길이 다르기에 그 길을 걸어가느라 일요일에 만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습니다.
가정을 갖게 되고 해야 할 일이 계속되기에 그 친구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습니다. 세월이 뚝 잘려 나가듯 어느새 시간은 번개처럼 흘러갔고 소식마저 아득해지며 그렇게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나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처럼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잘 지내는지도 모른 채, 연락을 한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그러한 시간만 쌓여갔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친구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는 이 시공간에 그 친구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렸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 친구는 이제 대답조차 하지 못합니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 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어린 시절 그 아름다웠던 시간을 다시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러한 시간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한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의 순간은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꿈꾸었던 그러한 시간이 이제는 불가능합니다.
하얀 목련은 하얀 조등(弔燈)으로 바뀌어 버렸고, 목련 그늘이 있어도 그곳에서 함께 할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엔 선후배가 없다는 것, 나이에 상관없이 이 땅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 미루기만 했던 것일까요?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고, 이야기하고 싶어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저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 친구와 함께했던 그 아름다운 순간의 추억일 뿐입니다.
그 누구와 그런 순간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아마 다시는 그런 시간들이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친구였기에 가능했던 순간들이었고, 이제는 그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비록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 친구에게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들어 준 것은 너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