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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온 시간들 Sep 20. 2022

얼음이 되어 버린 사람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은 어느 한 남자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범하고 다른 이에게 악한 짓을 하지 않았던 주인공은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게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주저하지만, 어느 한계점에 이르러 결국 그는 복수를 할 수 있게 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그 한계점을 넘는 순간 이를 실행으로 옮길 수 있게 됩니다. 


  물은 0도 이하가 되면 얼음이 됩니다. 그 0도라는 한계가 바로 빙점, 즉 어는점이 되어 그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맙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감정이 점점 부정적으로 변하면서 그 정도가 심해집니다. 겨울이 시작되어 시간이 지나면 점점 기온이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스스로를 변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예전에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의 모든 것이 싫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전에는 함께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한순간도 그 사람과 어떤 것도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시청의 낡은 문기둥 옆에 선 채 게이조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요코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게이조는 코트깃을 세웠다. 본심은 요코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쓰에에게 범인의 자식을 키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배반하고 무라이와 정을 통한 나쓰에 때문에 그날 루리코는 살해되었다. 나는 그런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괴로워할 날을 위해 그 아기를 데려온 것이다. 나쓰에의 부정을 일시적인 마음의 방황으로 돌리고, 어떻게든 용서할 수는 없는가? 한번은 나도 용서를 했다. 루리코의 죽음을 미칠 듯이 슬퍼하는 나쓰에를 나는 용서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루리코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또다시 무라이의 품에 안겼을 리가 없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면 온도가 내려가듯이,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다시 기온이 올라갑니다. 정말 복수심이 불타오를 정도로 싫은 사람도 처음부터 그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현재에 이르러 변했듯이, 현재의 감정이 시간이 지난 미래에 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월은 사람의 마음을 언제나 변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직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에 엄청난 복수심에 가득 차서 어떠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미래의 모든 가능성마저 전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악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 인생을 알게 되면 언젠가는 선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고 새로운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모두 막아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어쩌면 더 비참해질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수도 사랑하라”라는 말은 진정으로 깊은 깨달음의 인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나의 원수일지 모르나 훗날 그가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지금 나의 지식으로 극단적인 것을 결정할 만큼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복수를 한다고 해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나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후련할지는 모르나 그 나머지 결과는 오롯이 그의 책임입니다.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할지 모릅니다.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남을 비판하면 할수록 점점 더 커다란 비판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 자신은 어느 순간 빙점을 넘어서게 되어 내가 복수하려는 그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으로 될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이 얼음이 되어 버리고,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릴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얼음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에 이제 그에게는 봄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제 주어진 나머지의 모든 시간을 추운 겨울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그저 성경에 나오는 비현실적이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탁상공론 같은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아마도 복수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나 자신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지독한 미움과 복수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나 자신을 위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얼음을 스스로 녹일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녹아야 내 주위도 녹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추운 겨울이 가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이라는 계절이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합니다. 나에게 봄을 선물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것만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아 결국 남는 것은 커다란 상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오늘 당장 끊어내는 것만이 진정한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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