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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09. 2018

<영화 한공주>

- 제대로 살고 있냐고 묻는 영화 -


흔들리는 눈빛으로 ‘전 잘못이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한공주의 대사로 영화는 시작된다. 하지만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공주를 둘러싼 어른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교무실 한 구석에 앉아있는 공주에게 뭔가 잘못이 있겠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영화 <한공주>는 2004년 밀양에서 실제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밀양 소재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여중생과 여고생을 집단 성폭행한 이 사건에서 공주는 피해자였다.

     




쫓기듯 전학을 한 공주는 교사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은 힘겹기만 하다. 연락이 끊어진 엄마를 수소문해 찾아가지만 이미 재혼한 엄마는 딸의 방문을 대놓고 불편해한다. 아버지는 딸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돈을 받고 가해자와 합의해 공주를 또 한 번 무참하게 짓밟는다.

부모에게서 조차 버림받은 그녀가 마음을 내려놓고 쉴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공주가 가지고 다니는 작고 허름한 트렁크는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고단한 처지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했다. 트렁크를 끌고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만 했던 공주의 삶은 죄를 짓고도 버젓이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는 가해자의 삶과 대조된다.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이 되어 고통을 감내하면서 숨어 다녀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분노를 넘어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학교를 옮긴 뒤 그녀는 수영을 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처음 배우는 수영이 만만할 리 없었고 진척 없이 힘만 들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수영을 배워?” 친구들이 묻는다.
“나중에 물에 뛰어들었을 때 혹시라도 살고 싶을까 봐” 


가장 친한 친구였던 화옥은 지옥 같은 그 날 이후 임신을 했고 결국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강에서 죽은 친구를 바라보며 절망에 몸부림쳤던 공주는 물을 이기고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물에 빠졌을 때 자맥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구명조끼를 던져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주가 수영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였다.  

  

 



우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피해자의 경우 평생을 트라우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 피해자는 상처를 껴안고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잔인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주는 수영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상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애쓴다. 차분하게 자신 앞에 주어진 새 삶을 마주하며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공주는 부도덕과 편견이 판치는 폭력적인 세상과 대비된다.     


새로운 학교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준 같은 반 친구 은희 덕분에 공주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공주의 노래를 듣고 재능을 알아본 은희는 적극적으로 그녀를 위해 나서 주지만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던 공주는 예민한 반응으로 친구들을 당황하게 한다. 친구의 선의는 공주에게는 오히려 위협이 되었고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공주는 다가오는 친구들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위태로운 삶이었지만 친구와 음악을 통해 조금씩 새로운 삶에의 희망을 꿈꾸려던 찰나 공주의 삶은 다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가해자의 잘못 보다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시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잣대는 피해자를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빠트린다. 합의를 통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가해자 부모들은 끊임없이 피해자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영화 속에서 공주의 평온한 삶 속으로 다시 찾아온 불청객도 그 알량한 ‘합의’를 위해서였다. “내 새끼 앞날을 생각해 달라” 면서 뻔뻔하게 공주에게 탄원서를 내미는 가해자들의 부모는 자기 자식만을 챙기는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를 보여주었고 공주를 영원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마음을 열고 공주를 챙겨주던 교사의 어머니도 공주의 사연을 듣고 분노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녀를 외면했다. 교사 어머니의 남자 친구이자 파출소장은 친구 부탁이라면서 공주에게 탄원서를 내밀었다.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던 친구 은희 마저도 성폭행 동영상을 본 후 공주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보듬어주고 싶어 하고 가엾어하면서 나와 그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면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거기에 대한 고민이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수진 감독은 영화 <한공주>의 출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었던 공주는 다시 트렁크를 챙겨서 위탁되었던 집에서 나온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친구처럼 강에 뛰어드는 것이 전부였다. 그토록 수영에 집착했던 공주는 한강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을까?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물에 빠졌던 공주의 몸이 떠오르고 수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뒤이어 공주를 응원하는 힘찬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실상 공주는 수영을 잘 하지 못했다. 수영장에서 연습을 할 때면 물을 먹기 일쑤였다. 따라서 한강에서 능숙하게 수영하는 장면은 감독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은 손 하나만 내밀어 줬어도 공주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방관하고 모른 체 하는 사이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소녀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사운드 트랙의 응원 함성에 선뜻 내 목소리 하나를 얹을 수 없는 이유였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겪은 상처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영화가 제작된다. 사건을 상기시키고 무자비한 폭력에 떠밀려 사회 밖으로 추방당한 피해자를 다시 보듬어 안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다. 공유해야 할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사건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자극적인 영상과 이미지로 자칫 타인의 불행이 영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야기로 사건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외부로부터의 접근일 수밖에 없으며,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들이 피해자의 고통에 다가가려 했지만 대부분은 진실과는 먼 공허한 메아리로 흩어지곤 했던 이유다.     





이수진 감독은 에둘러 사회문제에 심각하게 접근하는 대신 부조리하고 비겁한 사회 속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선 한 개인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기로 한다. 그래서 영화 <한공주>에서는 피해자가 정면에 나선다.

피해자를 대신해 정의를 실현해 주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고, 가해자 입장에서 어설프게 속죄하는 영화도 아니다. 분노하거나 싸우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인 공주를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지옥 속을 헤매고 있을 한 소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어서일 것이다.

감독은 삶이 비록 지옥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봐야겠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마지막 의지마저 못 본 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공주를 범하던 42명의 고릴라들은 어른들의 이기심과 탐욕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만을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오던 편의점 주인의 행동은 우리 모두가 사건의 공범임을 보여주는 섬뜩한 장면이었다.

피해자 개인에게 일어난 폭력인 동시에 공동체의 도덕성에 심각한 균열이 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공주>는 피해자가 보호받기보다는 도망치게 만드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어른이라는 사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어린 소녀를 죽음으로 내 몬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무거운 부채감을 상기시킨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클로즈업이 잦은 불안정한 화면은 공주의 마음속 지옥의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하고 불편하다.     

세상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공주는 지켜주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딸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제대로 살고 있느냐고...


그래서 <한공주>는 힘들어도 꼭 봐야 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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