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그녀는 엄마였다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퇴근하고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 후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와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여성이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섰다. 머리색깔만 보고 당연히 그 여자 아이의 할머니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이 후 몇 번을 더 마주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대여섯 살 또래의 아이를 둠 직한 젊은 여자였다. 그 여성은 아이의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머리가 백발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염색을 전혀 하지 않고 자연스런 백발 상태로 다니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눈에 띄어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하얀 머리 그대로,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모습 위로 또 다른 여성이 겹쳐졌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후보자로 지명된 날 소셜미디어에는 그녀의 ‘머리색’을 멋지다고 평가하는 글이 쏟아졌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도 그녀의 은발이었다. 흰 머리는 가리는 게 미덕이었던 한국사회의 분위기상 그녀의 은빛 머리칼은 파격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긍정적이었다는 것이 반가웠다.


한국사회에서 외모는 늘 갑이었다. 얼굴은 계란형에 날렵한 턱선을 자랑해야 하고 44, 55 사이즈가 아니면 모두 뚱뚱보로 등극했다. 잡티 없는 도자기 피부에 늘씬한 각선미를 가진 연예인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선망의 대상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엄격한 기준에 부합하는 외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최대한 가리는 게 미덕이었다. 허리 옆으로 비져 나오는 살은 헐렁한 티셔츠로 가리고 희끗희끗한 새치는 염색으로 감춰야 했다. 굵은 종아리와 튼튼한 팔뚝도 긴 옷으로 가려 마땅한 대상이었다. 외모 중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강경화 장관의 은빛 단발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었다. 한 올의 새치만 보여도 가리기에 급급했던 중년들의 놀라움은 특히 컸다. 억지로 꾸미지 않아 더 매력적”이라 했고, “나도 훗날 염색을 하지 않겠다”며 선언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미의 기준은 부족한 것을 가리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에 데 있는 듯 했다. 네티즌들이 열광한 것도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당당함에 대한 응원이 아니었을까.


외모의 단점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다.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사용하였는데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주관적인 느낌이다.


간혹 자존감은 자존심과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존심’이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이라면 ‘자존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타인과 경쟁에서 이겨야 하며 패배할 경우 자존심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상황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자존감은 기초체력과 같다. 불안과 무기력이 찾아 왔을 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감기처럼 일시적으로 앓고 지나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불안이나 분노가 커지고 악순환을 반복하는 동안 증상은 더 심각해진다.


하지만 수많은 자기계발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인 자존감은 ‘타인에게서 사랑받은 기억의 총합’ 이다. 타인에게서 받은 사랑의 총량 만큼 딱 그만큼만 나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어린 시절 결핍이 있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랑받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 또한 ‘사랑’에 있다. 타인에게 먼저 사랑의 손길을 건네면 내가 내민 사랑의 손을 잡은 그 타인 또한 나를 사랑하게 된다. 타인에게서 받은 사랑이 자존감의 든든한 뿌리가 되어 가지를 내리고 하나 둘, 열매를 맺게 된다. 얼핏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연예인들이 정상에서 내려오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은 ‘팬의 사랑’ 이라는 모래성 같은 허망한 사랑에 기대기 때문이다. 모래성은 작은 파도만 밀려와도 맥없이 무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나는 멋져, 나는 특별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앵무새처럼 외치는 것이 아니다. ‘멋지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랑받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 멋진 나, 더 대단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 대로의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건강하고 탄탄한 자존감은 결국 나와 연결된 주변인에 대한 사랑이고 이는 삶과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마음과도 통한다.


이웃집 여자의 당당함은 그 자체로 멋진 그녀의 은빛 단발과 머리카락보다 더 빛나는 자존감 때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