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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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역설적으로 그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복제인간을 다룬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아일랜드>는 첨단 과학의 발전으로 이루어 낸 미래 세계의 위험을 경고한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는 ‘클론’이라 불려지는 복제인간의 삶과 사랑을 통해 또 다른 관점으로 미래 세계의 디스토피아에 경고장을 던진다.


1990년대 후반, 인간 복제가 가능한 세상. 평온해 보이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영국의 기숙학교 헤일셤이 소설의 무대다. 헤일셤에서 생활하는 캐시와 토미, 루스 세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사랑과 질투, 왕따와 사소한 오해 등 학창 시절 누구나 겪을 법한 소소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한 소년 소녀들의 성장 소설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낯선 단어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담'이라는 여성이 등장하고, 학생들의 작품을 가져가는 '화랑'이라는 곳이 있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도 뭔가 석연치 않다. 교장은 아이들에게 “너희는 특별한 존재”라고 강조할 뿐 이들이 왜, 어떻게 이 곳에서 살게 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은 안갯속을 달리는 듯한 모호함과 불편함을 견디고 나면 마침내 헤일셤의 베일이 하나 둘 벗겨지기 시작한다. ‘기증' 이라든지 ’ 근원자‘ '클론'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고 흩어진 퍼즐 조각이 하나 둘 맞춰지면 이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 <나를 보내지 마>는 가상의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한 클론(복제인간)의 이야기다.


헤일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캐시는 성인이 되어 간병사 일을 시작한다. 학창 시절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루시가 장기기증 후 회복센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간병일을 맡기로 결심한다. 또 다른 장기 기증자 토미와도 조우한다. 토미와 캐시는 헤일셤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루스가 토미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하면서 둘의 인연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엇갈린 사랑과 운명 속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헤일셤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면서 학창 시절 내내 그들을 사로잡았던 의혹을 하나 둘 풀어 나간다. 성장하면서 자신들의 존재의 비밀에 대해 서서히 자각하는 과정은 잔잔하게 그려져서 더욱 애잔하다.

영화 <아일랜드> 나 <가타카> <블레 이너 러너> 속의 복제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헤일셤의 아이들은 인간을 위해 장기를 적출당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도구로 태어난 가혹한 운명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복제인간일지라도 진실한 사랑을 입증할 수 있다면 기증을 연기할 수 있다”는 소문을 믿고

다시 만나 사랑을 확인한 토미와 캐시는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긴다. 생명연장을 신청하기 위해 학창 시절 가끔씩 학교로 찾아오곤 했던 마담의 집을 찾아간다.

이곳에서 헤일셤 교장, 토미와 캐시의 극적인 만남이 이뤄지지만 둘의 소망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음이 밝혀진다. 예정된 운명대로 루시는 두 번의 장기 적출 후에, 토미는 네 번의 적출 후에 숨을 거둔다.





인간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고 수명이 인위적으로 제한당하는 복제인간들의 비극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랑을 위해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이들의 시도는 부질없이 끝나 버렸고 희망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저 바깥세상에는 마담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지도 않고 해를 끼치려 하지도 않지만 우리 같은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고 우리의 손이 자기들의 손에 스칠까 봐 겁에 질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 자신을 그런 이들의 관점에서 처음으로 일별 하는 순간의 느낌은 정말이지 등줄기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매일 걸어 지나가며 비쳐 보던 거울에 갑자기 뭔가 다른 것, 혼돈스럽고 기괴한 뭔가가 비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작가는 주인공 캐시가 겪는 갈등과 심리 변화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이성과 성에 대한 호기심,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의 갈등,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느낀 슬픔을 통해 그녀가 보통의 인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임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복제인간에게 도움을 주려는 시도가 없는 건 아니다. 교장과 마담은 복제인간의 삶의 질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물이 헤일셤이라고 항변한다. 헤일셤에서 아이들은 그림을 배우고 예술을 접하면서 인간적인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시와 그림에는 인간의 내면이 깃들어 있고 복제 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들에게 어쩌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말의 양심을 건드린 것에 대한 불편감 때문이었을까. 실험적으로 시도된 헤일셤의 교육방식은 결국 학교 폐쇄로 막을 내리고 만다.





교장과 마담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장기기증 제도를 위해 클론을 사육하는 일종의 관리자였을 뿐이었다.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파동이 일어날 때면 가축들의 사육환경에 대한 여론이 들끓는다. 하지만 비좁은 공간에서 키우든 드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방목하든 이들이 가야 할 종착역은 결국 도살장이다. 복제인간에게는 기증센터가 바로 도살장이다. 이들은 열여섯 살이 되면 헤일셤을 졸업하고 세상으로 나가서 인간들을 위해 장기를 적출당한 뒤 생을 마친다. 교장과 마담이 그림이나 예술교육을 운운하는 것은 결국 고기의 질, 혹은 장기의 질을 운운하는 언어 언어도단에 지나지 않는다. 클론의 입장에서 교장이나 마담의 말은 위선이고 공허한 위로일 뿐이다. 캐시와 토미가 그들의 사랑을 위해 구원자를 만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마담과 교장을 찾았지만 헛된 희망임을 확인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자발적인 장기기증이라는 부당한 상황이지만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복제인간과 복제인간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시 여기는 인간의 비인간적인 모습이야말로 진실로 암울한 디스토피아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인간 복제는 곧 다가올 우리의 미래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문학은 인간 복제와 그로 인한 존엄의 문제에 천착해 왔다. ‘가즈오 이시구로’ 역시 이 점에 주목했다. 복제인간 소년소녀들의 가슴 아픈 운명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설령 인간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운명을 마음대로 흔든다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체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과 편견, 욕망의 끝은 과연 어디일지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Never let me go’ ‘Never let me go’


소설 속에서 캐시가 부르는 이 노래는 복제인간인 캐시가 절대 가질 수 없는 평범한 삶에의 희구가 담겨있어 처연하기 그지없다.





친구와 연인을 먼저 보내고 장기 기증을 기다리며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캐시의 쓸쓸한 모습이 가슴에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인생의 마지막을 가장 젊은 시절에 맞이한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 빛나는 청춘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로 인한 슬잔상은 쉬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탁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