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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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었던 소설가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물리적 시간에 비추어 보더라도 나의 중년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잠시 아득해진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두려움이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삶의 아이러니다.
칼 융은 중년의 위기와 그 가능성에 주목했던 심리학자이다. 중년은 아니마(남성 안의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 안의 남성성)가 통합되고 페르소나에서 탈피해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시기라고 보았다. 그동안의 인생 경험에 의해 폭넓게 확장된 인식과 통찰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자의든 타의든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얼마간 체념한 자의 정신적 여유를 가진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유 덕분에 자신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모색할 수 있는 것 또한 중년이라야 가능하다고 융은 생각했던 것일까.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책 보다 영화를 먼저 접했다. 소설은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무언가에 끌리듯 무작정 리스본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비 오는 날 빨간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떨어뜨린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한 권의 책에 이끌려 그는 대책 없이 낯선 곳으로 향하는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고전문학을 가르치며 정돈된 삶을 살아가던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집과 학교가 그가 속한 세계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그냥’ ‘무턱대고’ ‘짐 조차 챙기지 않은 채’ 리스본으로 향한다. 너무나 익숙한 삶을 떠나 우연히 손에 들어온 한 권의 책에 의지해 주인공 프라두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태 전부라고 믿어왔던 내 삶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나도 모르는 여백의 삶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프라두의 물음이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크게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으리라는 삶에 대한 확실한 예감’과 ‘삶의 여백’ 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가 아닐까? 아니면 융의 말대로 중년은 또 다른 삶에의 기회일까?
57세의 나이에 자신의 또 다른 삶, 여백의 삶을 찾기 위해 사유의 여행을 시작한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에 동행한 것은 어쩌면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늘 안고 가야 하는 근원적인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에서 구하지 못하고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마르샤’의 정체성 이론에 따르면 성인이 되고도 꽤 오랜 기간 나는 ‘정체성 혼란’ 내지는 ‘유예’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고 어른들의 가치관을 비판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만들어진 이미지를 ‘나’로 착각한 채 살았다. ‘모범생’ ‘조용한 아이’ ‘자기주장이 없는 아이’ 등등이 학창 시절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내 이미지였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다. 아이에게 그 거울은 아마도 부모일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한 말은 그대로 아이의 정체성이 되어 평생을 따라다닌다. ‘넌 착한 아이’ ‘예의 바른 아이’ ‘참을성 없는 아이’... 등등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력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찾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어린 시절 부모가 무심코 한 말이 나란 사람을 규정하는 프레임으로 자리 잡았고 학창 시절에는 교사나 친구들,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동료나 지인들이 규정한 그대로의 모습이 내 정체성이 되었다.
하지만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동안 내 모습이 진정한 내가 아니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한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면을 타인이 알려줄 때가 있다. 또는 타인이 알고 있는 내가 나의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때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나, 타인이 지각하는 나, 어떤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
“사람들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 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만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 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무대의 베일이 벗겨지면 감춰졌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다양한 사회적 자아로 위장한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는 우리지만 가면을 벗으면 타인이 알지 못하는 숨겨진 내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어떤 게 진짜 나일까? 베일 속에 가려진 모습도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을 뿐, 결국은 그 사람의 일부이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낯선 모습은 그를 당황스럽게 한다. 예전에 알던 사람과 다르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넌 변했어’라는 말속에는 익숙함을 벗어나는 일, 나만의 견고한 프레임을 깨는 일이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1974년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속에서 불꽃같은 삶을 산 청춘 남녀 프라두, 조르지, 에스테파니아의 고뇌와 방황,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쫓으면서 그레고리우스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 기차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기차가 보이지도 않고,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가 신호를 제대로 읽는지, 전철이 잘못되어 있으면 알아채는지도.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칸을 바꾸지 못한다”
이미 궤도가 정해진 기차에 올라탄 우리는 정해진 궤도에 따라 여행하는 열차의 탑승객일 뿐이다. 속도도, 방향도 결코 바꿀 수 없고 누가 운전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불안 속에서 여행을 해야 한다. 열차에서 내릴 수 없음은 물론이고 원하는 칸으로 옮길 수 조차 없다.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언제 끝날지 아는 사람도 없다.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문득 "왜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는가?" 혹은 "죽을 운명을 타고 난 사람에게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고 뒤이어 불안이 따르게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인간은 피투성(彼投性, Geworfenheit)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어쩔 수 없이 내던져진 인간은 여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 (피투성)을 자각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고 언젠가는 죽음으로 인해 인생이라는 열차에서 결국은 하차하게 된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된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를 리스본으로 이끌었다가 다시 베른으로 데려온 야간열차는 인생에 대한 은유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삶으로 떠난 그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모험, 자신을 찾기 위한 사유의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면 불안도 함께 따라온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잘 가고 있는 건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그 모든 질문과 마주하기로 결심한다. 프라두가 시대의 혁명을 이끌었다면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삶 속에서 혁명을 실현한 것이었다.
“내 칸에 가끔 손님이 오기도 한다. 거의 언제나 나에게 맞지 않는 시간에 온다. 대부분 현재라는 시간의 손님들이지만, 과거에서 온 손님들도 많다. 이들은 자기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오가며 나를 방해한다. 몇몇 방문객은 소리 없이 사라지지만, 끈적이고 냄새나는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면 이 칸의 모든 것을 떼어내고 새 것으로 바꾸고 싶다.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있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살다 보면 햇빛 쨍쨍한 날만 있는 건 아니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더 잦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인생에 찾아든 불청객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방해하고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다. 파문이 일으킨 진동은 수습이 불가할 정도로 큰 타격으로 돌아오고 인생열차의 한 칸을 완전히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날은 아주 드물고 기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종착역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정도로 삶이 버거운 때가 더 많다.
견고한 자신만의 틀 속에서 모범답안처럼 살아왔던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라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 그레고리우스가 다시 기차에 몸을 싣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해도 이미 예전의 그는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여백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나이가 되도록 미처 경험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여백의 세계를 찾기 위한 용기 있는 도전을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인생, 새로운 자신에 대한 전망을 얻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도 시작된다 “
삶이라는 열차에 탑승한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파스칼 메르시어의 질문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인생에 한 번은 리스본으로 떠나는 야간열차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