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자라 마침내 내가 되었네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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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 있다.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 속의 단편 <서른>을 읽던 중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아 오래오래 이 문장 속에 머물렀다.
서른의 수인은 이십 대 때 알고 지냈던 언니에게 긴 편지를 쓴다. 열심히 살았지만 이상과는 점점 멀어진 자리에 어둡게 내려앉은 고달픈 현실이 그녀가 당도한 서른이었다. 선배의 말에 속아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열심히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올바르고 아름답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믿고 불나방처럼 제 무덤을 향해 날아갔다. 사랑했던 사람이 끌어들인 그 자리에 또 다른 사랑했던 사람을 끌어당겨야 살아남는 그곳에서 수인은 자신을 따랐던 제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만다.
특별할 것 같았던 20대가 저물고 평범한 삶을 갈망했지만 그 언저리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것마저도 여의치 않음을 뼈아프게 자각한 수인의 편지는 나의 스물, 그리고 내가 지나온 서른과도 겹쳐졌다. 이 문장에서 오래 머문 이유였는지 모른다.
‘꽃다운 스물’이란 표현답게 나의 스물은 제법 찬란했다.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지만(사실 별생각이 없었다) 입시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전공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부와는 담을 쌓은 채 여한 없이 놀았던 대학생활도 나쁘지 않았다. 졸업 후 잠시 막막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한 미련을 핑계 삼아 취업 대신 대학원을 선택했다. 전공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으며 공부다운 공부를 그때 처음 했다. 뒤늦게 연애를 했고 누군가가 온전히 나를 바라봐 주는 느낌이 싫지 않아 동기들보다 조금 이른 결혼을 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한 신혼생활이었지만 신혼이었기에 모든 게 용서되었다. 좁은 아파트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환경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낭만’이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신혼'이라는 상큼함과 어우러져 생활의 비루함과 마음속 희미한 불안마저도 교묘하게 가려 주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신혼생활도 종지부를 찍을 날이 찾아왔고 그 무렵 첫아이가 태어났다. 내 이십 대의 기록이다.
서른은 좀 힘들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지내는 시간은 힘겨웠고 ‘엄마’라는 렌즈로만 바라본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남편과 떨어져 독박 육아를 하는 동안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다. 아이가 커 가는 동안 나날이 저물어간다고 느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엄마 손을 덜 타게 되자 틈만 나면 인터넷에 접속했다. 정보의 바닷속을 헤매고 다니며 할 만한 일이 있는지 찾아다녔다. 때마침 원하던 정보가 올라왔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세 번의 기회는 찾아온다고 했던가. 내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도 빠르게 캐치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무시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뇌를 풀가동시켜가며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한 번도 안 해 본 밤샘 공부 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간절한 마음이 가 닿았는지 늦은 나이에 운 좋게 첫 직장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주부에서 커리어 우먼으로 꿈에도 그리던 삶의 대 반전이 일어났다. 예쁜 옷을 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멋지게 출근하는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빈곤한 상상력은 딱 여기까지였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라고 피해 갈 수 없었다. 늦깎이 사회 초년병으로 치러야 할 통과의례를 톡톡히 치르느라 애초에 기대했던 멋진 직장생활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로 대치되었다.
집안도 말이 아니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직 어린아이들 뒷바라지와 설거지와 빨래 등 내게는 언제나 난이도 ‘상’인 집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퇴근하고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무시무시한 워킹맘의 일상이 내게도 시작된 것이다.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고 시작한 야심 찬 취업 프로젝트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일과 가정 모두를 놓칠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구원투수로 등장하지 않았다면 9회 말 만루에서 홈런을 맞은 투수로 전락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빈약한 상상력을 탓해야겠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다. 힘겨운 나날들이 이어졌고, 어느 날 눈 떠 보니 내 청춘은 그렇게 가 버렸다. ‘되고 싶었던 나’ 대신 ‘되는 대로 나’가 되어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이십 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모든 게 과정이고 경험이니 실수도, 실패에도 한없이 너그러웠던 이삼십 대를 지나오니 이제는 막다른 골목이다. 어느새 작은 결정 하나에도 주저하는 소심하고 겁에 질린 쓸쓸한 중년이 되었다. 소설가 김훈의 말처럼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 이 되어 난감함과 불안이 교차하는 길목에 서 있다.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삶의 도로는 곳곳에 숨어 있는 돌부리에 시시때때로 발이 걸려 넘어졌고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린 날도 많았다. 세월이 앗아간 것들이 억울했고 한때 경멸했던 시시한 어른이 된 것 같아 불안했다.
수인의 편지는 속죄를 위한 힘겨운 발걸음이었다. 소설은 절망 속에서도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부여잡은 채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갈 수인을 응원했다. 마치 나를 응원하듯, 우리 모두의 삶을 응원하듯 소설 속 문장은 잔잔하게 마음을 울렸다.
결국 책과 글이 나를 구원했다. 책은 늘 읽었지만 글은 우연하게 쓰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사실은 내가 그토록 원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힘들 때마다 글 속으로 도피했고 글을 씀으로써 온전한 나로 살 수 있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위로해 준 것도 글쓰기가 준 선물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위로받는 날이면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하던 삶의 시곗바늘이 제 자리를 찾아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 째깍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수인의 목소리 흔적에 내 마음의 소리를 가만히 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