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유쾌한 책읽기

문유석 <쾌락독서>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나와 한층 가까워진(?) 문유석 판사의 책을 다시 찾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세상에 나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 또 있구나' 하는 안도 내지는 반가움, 떳떳하게 '개인주의자' 임을 선언하는 용기가 신선해서 남몰래 팬을 자처했었다.


<쾌락 독서>는 작가의 독서이력이자 즐거운 책 이야기를 가득 펼쳐놓은 이야기 한마당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소년 소녀 세계명작부터,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치르는 만화의 시절을 거쳐 흥미와 진지 사이를 오가며 폭넓은 독서를 한 경험이 오늘의 작가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의 작가는 시니컬하면서 자기주장이 강한, 근접하기 조금은 어려운 판사님 이미지였다면 <쾌락 독서> 속 작가는 책과 사랑에 빠진 개구쟁이 소년 같다. 즐거운 놀잇감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쁨에 달떠 발갛게 상기된 볼로 독자들에게도 어서 즐거운 놀이 속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천진한 소년 말이다.


독서는 즐거워야 한다. 추천도서,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하는 도서,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 등이 의미 없음은 그래서이다. 누군가의 강요로, 뚜렷한 목적(?)- 성적 향상, 글쓰기 능력 증진, 논술 준비 등- 을 가진 독서는 정작 가장 중요한 요소인 '쾌락'이 빠져있다. 앙꼬 없는 붕어빵이란 얘기다.

누구도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 의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독서는 그래서 해 봐야 별 소용이 없다. 그는 어려운 책, 읽어야 할 책보다는 자신에게 재미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얘기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쯤은 읽어줘야 폼 나는 독서를 했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역시 이번 책에서도 그와 나는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책이 만화라도 괜찮다고 그는 말한다. 작가는 학창 시절 만화를 보며 서양 역사, 중국 역사를 익혔고 좁은 나라를 벗어나 상상의 한계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비교적 늦게 만화세상으로 입문한 나는 당시 '여학생'이었고 부모님 말 잘 듣는 착한 '모범생'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조용한 아이였다. 나와 비슷한 부류의 아이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법한 만화방에 혼자서 몰래 드나들었다. 그것도 늦깎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곳에서 나는 문유석 판사와 마찬가지로 순정만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 들었다. <올훼스의 창>이나 <유리가면>이 당시 내 인생의 책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이유였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만화가게를 드나드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나만의 소중한 시공간이 확보된 나는 그 속에서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엄마한테 들키는 날이면 날벼락이 떨어진다는 것도 만화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만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만화방은 사회에서 낙오된 자들이 모여들 법한 낡고 퇴락한 공간이었지만 나만의 은닉처이자 안신처로는 손색이 없었다. 물리적인 공간은 더럽고 비좁았지만 심리적 공간은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펼쳐지는 파티와 권력자들 간의 암투, 혁명의 비릿한 피 냄새까지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한히 확장되었다. 만화 속 인물은 박제된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여기 지금에서 나와 심리적으로 연결된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어둑어둑해져서야 만화방을 나설 때는 한여름 밤의 한바탕 꿈처럼 아스라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어깨가 조금 처져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웹툰은 상당히 수준이 높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웹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편견을 깨 준 것이 <미생>이었고 드라마 <송곳>도 웹툰이 원작임을 알고 난 후에는 아이들에게 잔소리처럼 하던 ‘웹툰 그만 보라’는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


업무량이 많기로 악명 높은 판사에다, 작가, 거기다 드라마 대본까지 종횡무진 활약하시는 작가님~~~ 혼자서 다 하시면 저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요! ㅋㅋ 이런 분을 볼 때면 재주 없는 내 자신이 절망스럽다. 하지만 좋은 글로 독자들의 마음을 훔쳐가는 신스틸러 작가님 덕분에 오랜만의 나의 독서이력을 되돌아보며 잠시나마 어린 시절을 느껴보는 호사를 누렸다.


재판으로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쾌락 독서>를 읽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