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잠들기 전 할머니는 손주들을 위해 구수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하나의 경건한 의식처럼 밤마다 반복되었던 이야기는 천 일 동안 매일 다른 이야기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세라자드에 비길 만했다. 할머니표 환상 특급 덕분에 어린 내 가슴은 상상력으로 충만해졌고 할머니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잠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스스로의 목숨을 구한 <천일야화>의 세라자드처럼 이야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지만 끊임없이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헤매고 소비하며 재생산한다. 어린 시절에는 동화책이, 어른이 되면 소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음악과 영화에도 스토리가 담겨 있고 아이들이 열광하는 웹툰이나 게임도 정교한 스토리가 있는 콘텐츠가 인기를 끈다. 문학이나 예술 등 인문학 분야에서 주로 회자되었던 스토리텔링이 광고, 마케팅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예를 ‘애플’ 신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 이유는 스마트폰의 기능을 넘어선 잡스의 스토리텔링 능력 덕분이다.
<진품명품>이란 TV 프로그램이 있다. 소장하고 있던 옛날 물건을 가지고 나와 가격으로 가치를 매기는 프로그램이다. 가격이 결정되는 지점은 아마도 스토리일 것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가 그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물건은 당연히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이 천문학적인 숫자에 거래되는 이유는 ‘기능’ 때문이 아니라 물건 속에 담긴 ‘스토리’의 힘 때문이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해도 스토리가 없는 물건은 실제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교환가치로는 별 의미가 없다. 무릇 이야기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스토리에 열광한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귀로에 서게 되고, 갈등의 골이 깊어졌을 때 우리는 삶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애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력자가 나타나 힘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적대자가 나타나 한순간에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모든 과정이 이야기이고 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노력한다. 옛사람들이 남긴 이야기의 흔적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타인의 이야기는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인간의 역사는 곧 이야기의 역사다’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살벌한 각자도생의 시대, 초 단위로 시간을 분할해서 살아가야 하는 각박한 현실에서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유는 귀 기울이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사람 사이의 친밀감과 조건 없는 합의,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삶의 풍경 속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연대의 힘 때문이다. 나만의 외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속에도 같은 무늬의 파장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서로 공명할 때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진다.
며칠 전 출근길에 신호 대기를 위해 잠시 서 있었다. 우연히 옆을 돌아봤는데 행색이 초라한 아주머니 한 분이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잠시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곧 신호가 바뀌었고 아주머니를 뒤로 한 채 서둘러 차를 몰아야 했다. 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한 후에도 아주머니의 한없이 막막해 하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른 아침부터 남의 가게 앞에서 울먹이고 있었던 것일까?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아주머니의 절박한 마음만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가혹한 삶의 운명 앞에 내동댕이쳐진 깊은 무력감, 슬픔, 분노의 감정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누군가에게 절실히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함께 아파해 줄 누군가에게 억울함, 분노, 슬픔을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말이란 게, 하고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 새 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수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 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됐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것은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 [전갱이의 맛/권여선]
권여선의 소설 <전갱이의 맛>에 나오는 문장이다. ‘말’을 ‘이야기’로 바꿔도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말들은 물거품처럼 흩어져 공허하게 사라지거나 악착같이 살아남아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말하고 싶은 것들, 이야기해야만 하는 언어의 파편들이 마음의 감옥에 갇힌 채 아우성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를 재생산해야 한다.
우리는 자주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건 아닐까? 작고 보잘것없는 이야기, 나와 상관없는 소수의 이야기는 기사 한 줄로 거칠게 요약되어 진실이 부재한 채로 사실만 전달된다. 권력자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고 소수의 이야기에 귀를 닫는 행위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치르는 행위를 부추기고 힘없는 사람의 절박한 삶은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행위와 같다. 추락한 이야기는 어두운 심연을 떠돌며 아우성치지만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의 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출근길에 만난 아주머니의 이야기 역시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마음이 아팠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핵심은 “당신의 영혼으로 글을 써야 한다"라는 것이다. 영혼으로 글을 쓰라는 말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애쓰기 전에 스스로가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내 안에 차고 넘치는 이야기가 고여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결국 내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자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