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ll Alice, Still Mother
시어머니가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철옹성처럼 단단하던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 하나의 사건이 기억으로 머무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해외여행을 떠났다가 길을 잃어버린 어머니 때문에 아버님이 무척이나 마음고생도 하셨다. 병세가 심각해지면서 자주 집을 나가시는 어머니는 어느 날에는 경찰관의 손에, 또 어느 날에는 지나가는 행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족들의 보살핌만으로는 케어하기 힘든 한계상황에 다다랐다.
조발성 치매에 걸린 의사였던 남편에 대한 19년간의 간병 기록인 '낯선 이와 느린 춤을'(메릴 코머 저) 은 "나와 한집에 사는 이 남자는 내가 사랑해서 결혼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란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랑해서 결혼했던 나의 반쪽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봐야 하는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치매 초기에 어머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던 아버님은 불편한 마음을 ‘화’로 표현했고 어머님이 환자라는 사실을 자주 잊으셨다. 부부싸움이 늘었고 두 분이 다툰 날이면 울적한 마음에 술을 한 잔 하신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곧 아버님을 이해하게 되었고 전화벨이 울리면 아버님을 위로하고 힘든 마음을 공감해 드렸다. 가끔씩 시댁으로 달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으며 어머님, 아버님의 마음을 어루만져 드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결국 아버님도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힘들지만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우리 가족 모두는 이제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치매가 발병한 뒤로 일체의 병원을 거부하는 어머님은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점점 허약해지고 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아버님의 심정이 어떠하리란 걸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손으로 네 어머니를 보살피고 싶다’는 아버님의 말씀은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가 과연 얼마일지 가늠할 수 없게 한다. 신산스러운 삶의 굴곡을 겪으며 함께한 세월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쇠도 녹일 듯한 격정적인 사랑보다 함께 늙고 병들어 가며 서로를 보듬어 주는 잔잔한 사랑의 무게가 결코 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흔히 치매라고 알려져 있는 병의 대부분은 알츠하이머병을 일컫는다. 늘 사용하던 어휘가 기억나지 않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소한 것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중요한 일을 잊어버려 일상생활이 점차 망가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건망증이나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기억력 감퇴 정도로 생각해 가볍게 넘기기 쉽지만 병이 진행될수록 일상생활, 직업생활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 생활 전반에 걸쳐 독립적인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무엇보다 치매는 우리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슬프고 무서운 병이다.
최근 연구결과에서 알츠하이머의 병의 87%에서 우울 증상이 동반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기억력이 사라지고 생활 전반에 걸친 능력을 하나 둘 잃어버리면서 결국은 존재 자체가 상실되는 경험을 하는 치매환자의 경우 우울은 당연히 동반되는 증상인지 모른다. 어쩌면 환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시선이 더 견디기 힘든 건 아닐까?
영화 <스틸 앨리스>는 치매에 걸린 한 평범한 여성의 존엄과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다.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언어학자였던 앨리스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기억을 잃게 되고 조발성 치매 진단을 받게 된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그녀는 직장과 가정, 그리고 사회 속에서 점차 자신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교수로서 수업 능력을 잃게 되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급기야 집에서 화장실 조차 찾지 못해 실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병은 점점 앨리스를 침범해 들어가고 가족들은 ‘배려’라는 명목으로 앨리스를 아이처럼 보호하려고만 한다. 본의 아니게 앨리스는 가족 내에서 고립되었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치매의 경우, 환자와 병을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병과 환자를 동일시하게 되고 그로 인해 환자는 병을 앓는 와중에도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코너에 몰린 듯한 기분에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 환자는 자발적으로 삶에서 자신을 격리시키게 된다. 둘째 딸의 배려로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연설하는 기회를 갖게 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세상과의 소통을 이어가기로 한다. 언어학자인 그녀에게 소통은 자신의 존재 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병을 고백한 그녀는 ‘고통받는’ 대신에 ‘싸우기로’ 결심했다고, 과거를 그리워하고 절망하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쪽을 택했다고 담담하게 얘기한다. 병에 걸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가 Still Mother 인 것처럼.
작년 여름 시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아들, 며느리와의 여행을 어머니는 아마 기억 못 하실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은 아주 먼 옛날에 머물러 있고 그 마저도 조각난 파편으로 흩어져 있다. 여행의 흔적이나마 어머니의 기억 속에 심어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각인되었으면 좋겠다.
’ 기억‘은 사라져도 ’ 사랑‘은 남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