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서 행복해요?

모성에 대하여

몸 안에서 물컹한 것이 빠져나가면서 진통이 멈추었다. 하지만 아수라장 같은 출산의 경험은 온몸이 부서질 듯한 육체적 고통 못지않게 큰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 주었다. 온전한 인격체로서의 한 사람은 해체되었고 그 자리에는 산모, 엄마, 모성 등 생전 처음 듣는 낯선 단어의 조합이 혼란스럽게 떠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행복한 날보다는 힘든 날이 더 많았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아이의 웃음 한방에 고단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행복한 엄마, 칭얼대는 아이에게 한결같은 미소를 보내는 엄마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가 제 앞가림을 할 정도로 자라기까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너무나 큰 호사였음을 실감해야 했다. 우아하게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잘 수 있는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물감을 덧칠해서 이전 그림을 지우듯 내 이름 석자에 새겨진 개성은 점차 희미해지고 그 자리에는 오로지 ‘엄마’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만 채워지던 외롭고 고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의 유전자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각인되어 전해질 줄 알았다. 한밤중에 졸린 눈을 비비면서 젖을 먹일 때, 화장끼 없는 푸석한 얼굴에 고무줄로 질끈 묵은 머리로 외출 준비를 해야 할 때, 선 채로 찬 밥을 물에 말아 허겁지겁 먹어 치울 때, 나는 행복한 엄마가 아니었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실수로 밥그릇을 엎은 아이의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성격 파탄자에 무교양의 사나운 인격을 가진 피폐한 영혼일 따름이었다.


내 눈에 비친 이웃집 엄마들은 모두 좋은 엄마였다. 오랜 기간 모유 수유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손수 만든 유기농 이유식을 먹이고, 아이의 투정도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넘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이웃집 여자는 나의 초라한 모성을 부끄럽게 했다. 모성 결핍에 대한 근원적은 두려움은 죄책감과 불안으로 이어졌고 고달픈 육아의 시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선로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나에게 엄마로 사는 일은 인간적 성숙으로 이르는 값진 경험이 아니었고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임신을 결정한 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조차 짐작 못하는 상황에서 겁도 없이 또 하나의 생명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일이니 말이다. 도대체 이런 맹목적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화면 가득 붉은 물결이 가득한 가운데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 에바가 축제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은 누군가가 던진 붉은 페인트로 더럽혀진 집과 자동차를 마주하는 에바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등장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장면들이 삽입되고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듯한 수많은 군중 속에서 넋을 잃은 표정의 에바가 보인다. 이후 에바는 수감 중인 아들을 찾아간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엄마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있었고 아들이 저지른 일로 인해 엄마인 에바의 삶이 피폐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다.


이들 모자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결혼 전 자유로운 영혼으로 전 세계를 누비던 에바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임신 중, 그리고 출산 후 아이를 만난 기쁨보다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삶의 좌표를 수정해야 하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너무 예민하고 까다로웠다. 끊임없이 울어대며 엄마를 힘들게 했다. 준비되지 않은 엄마 역할을 꾸역꾸역 해 내느라 에바는 점점 지쳐갔지만 남편은 에바의 우울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에바는 타고난 모성은 부족했지만 노력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 케빈은 점점 삐뚤어져 갔다. 결국 수십 명의 아이들을 활로 살해한 후 아버지와 여동생까지 죽이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 만다. 아들 케빈의 악행으로 가족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홀로 남은 에바는 어렵게 잡은 직장 외에 가끔 교도소에 수감된 케빈을 찾아가는 일이 외출의 전부일 정도로 단조로운 삶을 되풀이한다.


범죄를 저지른 자식의 죄를 함께 감내해야 하는 부모는 어떤 심정일 까에 대해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부모의 애정이 더 강했다면, 혹은 엄마의 모성이 지극했다면 '사이코패스'로 설명되는 범인들의 끔찍한 '묻지 마 살인'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비록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영화는 에바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과 이해 부족으로 괴물이 탄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에바의 과거를 아무리 찬찬히 들여다 보아도 케빈의 악행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케빈에게는 뚜렷한 트라우마나 결핍이 없다. 중산층 가정에서 특별한 학대나 방치 없이 성장했다. 영화의 중간중간 보이는 케빈과 에바가 겪는 갈등은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있을 법한 일들이다. 하지만 에바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희생자의 부모로 보이는 여자에게 이유 없이 뺨을 맞아야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과 차가 붉은색 페인트에 뒤덮이는 끔찍한 일상을 견뎌야 한다. 피해자들의 해코지에도 에바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피해자들이 가한 폭력의 흔적을 묵묵히 지울 뿐이다. 말 그대로 에바의 삶은 말 지옥 그 자체였다.


"내 아이가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이 나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린 램지 감독. 도발적인 질문으로 모성신화를 해체시키고 충격적인 장면으로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섣불리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어설픈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리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케빈의 악행을 에바의 책임으로만 몰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케빈은 왜 그렇게 엄마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까 ‘ 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고 엄마라는 이유로 세상의 온갖 비난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 모성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 ‘ 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진다.


우리 사회의 모성신화는 그 뿌리가 깊고 질기다. ‘모성’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으로 여자라면 누구나 타고난 본성이라는 사회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연약한 한 생명체를 총체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어마어마한 일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전 과정을 주도하면서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엄마’라는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책임을 떠안는다. 자녀의 잘못은 곧 엄마의 잘못으로 대치되어 가차 없는 비난과 질책이 날아온다. 동네북도 이만한 북이 없다.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든가, 엄마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모성의 심각한 결함’ 이 있는 ‘부족한’ 여성으로 취급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여자의 최고 행복’이라는 명제는 언제나 진실이었고 세상의 엄마들은 이 당위적인 명제를 무의식적으로 체화해 나갔다.


결혼 전 여행가로 전문적인 커리어를 쌓았던 에바는 임신과 동시에 직장인, 여행가, CEO라는 타이틀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케빈의 엄마’로만 살아야 했다. 모성을 강제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이나 자존감을 잃지 않은 채 한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는 보여주었다. ‘살인자를 키운 엄마’가 되어버린 에바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존엄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다. 에바가 느끼는 고통 속에는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이 멀어져 버린 아들과 엄마 사이의 심리적 간극이 어두운 심연처럼 놓여 있었다.


‘엄마’이기에 삶을 포기할 수 조차 없었고, ‘엄마’이기에 쉽게 용서받을 수 없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발을 땅에 굳게 디디고 서 있어야 하는 그녀의 이름은 ‘엄마’였다. 한국어 번역 제목이 ‘케빈에 대하여’ 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화는 ‘케빈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케빈’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아들을 키운 한 엄마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끝났지만 바로 그 순간, 영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강제된 관계가 박제된 관계를 낳은 것일까? 자신의 욕구와 소망을 감춘 채 사회가 정해준 각본대로 ‘엄마’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에바의 말과 표정 속에 숨은 고통과 절망의 무게를 예민한 케빈은 눈치채고 말았던 것일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힘겹게 아들을 안아주던 에바를 보며 우리는 케빈의 엄마 에바, 즉 모성에 대하여 다시 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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