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이 울린다. 어머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장에 문제가 생겨 입원하셨는데 퇴원 후에도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아 마음을 졸이고 있던 터라 겁부터 났다. 연세가 있으신 아버지가 과연 수술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과 수술을 한다고 해도 이에 따르는 부작용을 피해 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데 대한 걱정은 겉으로 드러난 합리적이고 올바른(?) 감정이다. 반면에 사전 검사를 위해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입원과 수술 후 보호자로 몇 날 며칠을 병원에서 보내야 하는 고단함과 일상생활에서 감내해야 할 지장까지 생각하느라 바쁜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 그러나 훨씬 더 강력한 감정을 품고 있다. 내 안의 두 자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승효과를 일으켜 마음속은 순식간에 걱정과 근심, 불안과 짜증으로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어머니의 카톡에 심드렁하게 반응하게 되는 이유다.
만약 부모님이 아니라 내 아이가 아픈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다양한 감정의 층위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걱정과 근심이라는 단일하고 강력한 감정 외에는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쩔 수 없는 내리사랑인가..
친정, 시댁 모두 연로하신 부모님 두 분만 계신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자주 내려가지 못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하는 염치없는 며느리이자 무뚝뚝한 딸이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친정에 가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우선으로 할 때가 많다. 자식으로서의 근원적인 부채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다. 오랜만에 친정에 가면 학창 시절 친구들도 보고 싶고 두고 온 가족들 생각 잠시 내려놓고 혼자만의 고즈넉한 시간을 누리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허리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하신 엄마가 하시는 집안 살림은 곳곳에 손길이 닿아야 할 곳 투성이다.
당장 먹을 반찬도 제대로 없어서 친정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장을 보고 간식거리며 반찬거리를 사다 나른다. 사온 반찬은 어지러운 냉장고 속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없는 솜씨에 몇 가지 밑반찬을 급하게 만들어 상에 올린다. 딸이 차려주는 밥상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음식 다운 음식을 드셔서 그런지 두 분 부모님의 수저가 평소보다 바쁘게 움직인다. 딸 노릇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설거지를 마치고 집 근처 마트에서 필요한 생필품 몇 가지를 사고 나면 하루가 금세 저물어 버린다.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카톡 창에는 “미안하다” 는 엄마의 문자가 찍혀있다. 친정으로 내려가기 전에 엄마는 ‘굳이 내려올 거 없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셨다. ‘올 거 없다’와 ‘미안하다’가 수없이 공회전한다. 딸이 보고 싶은 마음과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한 순간 ‘보고 싶다’ 쪽으로 맥없이 기울어져 버리는 부모의 마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나이가 든다고 퇴화하지 않겠지만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는 못하는 듯하다. 가슴 한쪽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미안하다’는 네 글자가 마음에 한 땀 한 땀 새겨진다.
어머니 문자의 종결 문장은 항상 ‘미안하다’이다. 뭐가 그리 미안한지, 왜 그렇게 미안한지 어떨 때는 따지고 싶을 만큼 짜증이 확 밀려온다. ‘아 제발 ‘미안하다’ 소리 그만 좀 해요!‘라고 해 보지만 돌아오는 답 역시 ‘미안하다’이다. 이쯤 되면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태어나서 죄송합니다’의 부모 버전을 떠올리게 한다. ‘부모라서 미안합니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았다.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말이 시끄러운 음악 속에 묻혀 버리도록 볼륨을 한껏 높였다.
시어른들이 가끔 집으로 오실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며느리로 산 세월이 제법 오래다 보니 시부모님들이 오신다고 해도 예전처럼 부산스럽게 준비하지 않고도 마음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세월의 내공 덕분 일까? 평소보다 한 두 가지 반찬만 더 만들고 뜨끈한 된장찌개만 올렸을 뿐인데 진수성찬이라며 맛있게 드시는 시부모님은 오랜만에 며느리가 차려내는 소박한 밥상에 미안해하며 수저를 드신다. 일 하는 며느리가 당신들 때문에 더 피곤해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대게는 하룻밤, 길어야 겨우 이틀 밤을 주무시고 민폐라도 끼칠세라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 가시는 어른들의 뒷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는 이제 아들 집에 오는 것 마저도 힘들어하신다.
살이 많이 빠진 부모님의 모습은 흡사 타다 남은 마른 장작개비를 떠올리게 한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한겨울 나목 같은 부모님의 육신은 당장이라도 사그라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딸이 가야 목욕이라도 할 수 있는 어머니의 몸은 살이 빠져나가고 가죽만 남아 내 손이 닿는 대로 대책 없이 출렁인다. 치매로 인해 점점 황폐해져 가는 영혼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시어머니, 그런 어머니 곁을 지키느라 심신이 지쳐버린 시아버지의 처지 역시 다르지 않다. 꽃과 이파리가 모두 떨어진 앙상하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휑한 바람이 분다.
자식을 위해 부모의 행복은 늘 유예 상태였고 자식의 인생을 위해 당신들의 인생은 포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신산스러운 세월을 온몸으로 겪으며 자식을 키워내고 그 자식들 역시 세상 풍파를 겪느라 굵은 빗줄기를 피해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부모는 점점 우산 밖으로 밀려난다.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옷을 채 말릴 겨를도 없이 쑤신 무릎을 부여잡으며 걸어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은 메마른 사막을 묵묵히 횡단하는 낙타를 닮았다.
부모님의 ‘미안하다’는 말속에는 당신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미안함’ 이 자리하고 있다. 나이 들고 병든 부모라서, 해 준 게 없어서, 자식에게 폐만 끼치는 존재라서 한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단다. 부모로 산다는 게 자식에게 죄를 짓는 일은 분명 아닐 텐데 늙은 부모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노화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늙어가는 몸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에 압도당할 때면 짜증이라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현하고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선 몸에 대한 못마땅함으로 창피해하는 일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늙음’ 은 미안해야 할 일도, 사과해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한 존재의 무너짐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하는 심정은 애달프기 그지없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흑백 사진 속 젊은 부모님의 단단한 어깨와 넓은 가슴에 다시 한번 안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