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성장하면서 각 연령별로 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발달과업이라 한다. 돌 무렵이 되면 걸어야 하고, 조금 더 지나면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 아동기가 되면 사회규칙을 습득하고 또래 관계를 통해 사회성을 길러야 하며 청소년기가 되면 정체감 형성이라는 과업을 완수해야 한다. 성년기가 되면 직업인, 배우자, 그리고 부모로서의 역할이라는 또 다른 과업이 기다리고 있다. 각 시기의 발달 과업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 전 단계에서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의 여부가 다음 단계의 과업 수행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 즉 제 때 과업을 완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의 이동이 어려워져서 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제 때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사회성 발달에 지장이 생기는 등 이후 단계의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발달과업과 별도로 각 나이별로 반드시 이수(?) 해야 할 또 다른 과업이 있다. 이 과업은 인간의 발달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평균적인 과정을 따라가지 못할 경우 자존감 하락, 불안과 공허에 시달리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학창 시절에는 엄친아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학업에 매진해야 하고 졸업하면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야 한다. 전쟁 같은 취업시장을 뚫고 가까스로 직장인이 되면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가 기다리고 있다. 결혼을 제 때 하지 않거나 비혼을 고집하면 주위의 시선에 신경이 쓰이고 명절마다 고문을 당해야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한다. 30대가 되면 한, 두 명의 자녀와 회사의 중간 관리자의 위치에 있어야 하고, 40-50대가 되면 외제차에 주말이면 골프 정도는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아파트 평수도 나이에 비례해서 차곡차곡 넓혀가야 정상으로 여겨진다.
나이 때별로 완수(?) 해야 하는 과업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가까스로 갔다고 해도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삶은 자주 흔들린다. 평균에서 벗어난 삶, 남과 다른 삶은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된다. 하지만 끝없는 경쟁을 뚫고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해도 행복이 곧바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이 갑자기 공허하게 느껴져 우울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날씨가 쌀쌀해지니 거리 곳곳에 반가운 포장마차가 보이기 시작한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붕어빵 장수다. 붕어빵 모양의 틀 속에 반죽을 붓고 팥이나 크림을 채운 뒤 뚜껑을 덮고 잠시 기다리면 먹음직스러운 붕어빵이 만들어진다. 종이봉투에 담겨서 내 손에 온 붕어빵은 봉투에 엷게 배어 나온 기름과 함께 순식간에 입 안에 군침을 돌게 한다. 조심스럽게 붕어빵 하나를 꺼내서 머리 또는 꼬리부터 한 입 배어 물면 그 달콤함에 몸과 마음이 행복해진다. 겨울의 소확행 중 하나다. 붕어빵은 맛도 모양도 모두 동일하다.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틀에서 구워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붕어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와 성별에 따라 구분된 똑같은 틀 속에서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이십 대가 살아야 할 상자, 삼십 대가 들어가야 할 상자, 사오십 대가 꾸려야 할 상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 틀 밖으로 조금이라도 벗어갈 경우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 하고 ‘실패한 인생’이라는 동정의 시선을 받아야 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는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는 상상의 세계가 주 무대다. 짝이 되는 조건은 ‘공통성’이다. 서로 간에 공통점이 있어야 커플이 될 수 있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동물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남녀는 필사적으로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동일해야 살아남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같음’을 연기한다. 이 사회가 끔찍한 것은 ‘동일성’의 논리에 의해 굴러간다는 점이다. 같아야 하나가 될 수 있는 사회, 공통분모가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는 규범의 본질 속에는 끔찍한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 길들여진 우리는 ‘다름’을 ‘틀림’과 동의어로 받아들인다. 60대에 공무원이 된 사연이 화제가 되고 70대에 시인이 된 할머니가 기사거리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틀 밖의 세상은 궁금해해서도 안 되고 밖으로 나가서는 더더욱 안 되는 위험한 곳일 뿐이다. 이 직종에서 여자는 승진하기 어렵다거나 이 일은 남자가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스웨덴의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 사진전을 다녀왔다. “상상을 찍는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은 스웨덴에서 태어나 체코 프라하에서 활동 중인 작가이다. 그의 사진은 우리를 단숨에 상상력의 세계로 데려간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거대한 핀셋으로 집어보고, 둥근 보름달은 직접 따다가 어딘가로 가져가려는 듯 차에 싣는다. 눈 앞의 도로가 반으로 갈라지는가 하면 거대한 물고기가 섬을 이고 있다. 바닥으로 화병이 떨어졌다. 가까스로 잡았는데 깨진 것은 화병이 아니라 손이다. 양털을 깎으면 뭉게구름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간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 그의 사진은 경직된 뇌를 말랑말랑하게 해 주었고 어린 시절 상상의 세계 속으로 순식간에 시간이동시켜 주었다. 달의 모양이 바뀌는 이유는 누군가가 매일 달을 바꿔달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은 양털이 하늘로 올라가서 생겼고, 물고기가 이고 있는 섬은 어디든지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리라는 상상이 작품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실 풍경이 떠올랐다. 출석체크를 마치면 교사가 학생들의 작품을 둘러보고 “여기는 지우고, 여기는 다시 하고~”라고 한 마디 한다. 교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은 지적당한 부분을 지우거나 수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에릭 요한슨 같은 작가가 나오지 못하는지에 대한 답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영어를 잘 하지만 수학을 못하는 아이는 부족한 수학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지적당한다. 수학이 부족하니 채워야 한다고 닦달한다. 교육을 뜻하는 education의 라틴어 원뜻은 ‘이끌어낸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개인의 소질과 능력을 이끌어 내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적 장치 이자 과정이 교육인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가진 잠재력을 끌어내기보다는 무언가를 집어넣기에만 급급한 것이 우리 교육이다. 가진 것에 대한 칭찬 대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아이 스스로 자신을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으로 느끼게 하고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게 한다. 방점이 자신의 내부가 아닌 바깥에 찍히게 되면 끊임없이 남과 타인을 비교하게 된다.
나와 다르다는 것은 호기심이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 남녀관계에서 ‘다름’에 매혹당해 결혼한 커플이 비슷한 성향의 커플보다 더 많다고 한다. 하지만 ‘다름’은 갈등이나 대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갈등 상황에서는 매력 포인트가 전쟁의 씨앗으로 돌변한다. 나와 다른 상대방의 성향이나 행동이 비난의 대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의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지만 때로 ‘꼰대’라는 딱지를 붙여 ‘다름’을 강조한다. 내향성의 신중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동경하는 외향형의 사람과 적극적이고 실행력이 강항 외향형을 부러워하는 내향형이 갈등 상황에 처하면 상대방의 다른 점은 곧바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외향형은 내향형을 답답하게 여기고 반대로 내향형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외향형의 업무 스타일에 질색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서로의 ‘다름’은 때에 따라 득이 되기도 하고 실이 되기도 한다. ‘다름’이 가진 양면성을 잘 이해해야 공존과 소통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틀을 깨는 새로운 생각을 환영하고 발상의 전환에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그 자체로 존중받는다. ‘다름’은 고유성과 개성으로 비쳐 저마다 빛을 발할 수 있다.
남과 다른 길을 간다고 두려워말자. 20대에 결혼은 안 해도, 30대에 직장이 없어도, 40대에 넓은 평수의 아파트가 없어도 괜찮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너와 내가 기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너와 나의 삶의 가치가 다를 뿐이다. 나만의 점을 찍을 때 점은 선이 되고 선이 연결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나와 다른 타인의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불통의 사회, 혐오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소통을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우리, 붕어빵은 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