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면의 밤이 잦아졌다. 오늘도 한밤중에 잠이 깼다. 이불속에서 뒤척이다 결국 포기하고 거실로 나왔다. 창 밖으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비 답지 않게 제법 많은 양의 비다. 규칙적인 빗소리 사이로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서 부는 일명 ‘도시풍’ 이 엇박자로 포효한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되는 듯 기세가 제법 맹렬하다.
베란다 창을 마주한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빛에만 의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의 고요는 규칙적인 빗소리와 함께 번잡함 없는 편안함 속으로 나를 안내했다. 텅 빈 무의 시 공간 속에 나 홀로 인 듯한 홀가분함에 머리가 맑아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새벽이 올 것이다. 동물은 밤 사이 젖은 날개를 말리며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 직장인은 잠과 싸우며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가족들의 무사한 하루를 위해 누구보다 이른 아침을 여는 주부들의 시간이기도 하다.
젊은 날에는 여름을 사랑했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눈부신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던 ‘젊은 육체’도 사랑했다. ‘태양’ ‘바다’ ‘여름’과 ‘젊은 육체’는 떨어질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단어다. 나이가 들면서 내 사랑의 대상은 어느새 겨울을 향해 조금씩 방향을 트는 중이다. 매서운 칼바람과 얼어붙은 대지, 잿빛의 흐린 대기는 나를 좀 더 깊숙이 안으로 들어앉혔고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며 고독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도 주었다.
처음으로 유럽 여행길에 올랐을 때도 겨울이었다. 유럽의 겨울은 우리나라보다 해가 더 늦게 뜨고 일찍 진다. 늘 보던 시곗바늘과 일치하지 않는 바깥 풍경, 낯선 경험에 당황했지만 어느 순간 어두운 유럽 하늘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벨기에의 도심 속 공원을 지나는 동안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며 흐린 겨울 동안 이 도시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공원의 벤치를 하나 차지한 채 샌드위치와 뜨거운 커피를 먹으며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다가 영감이 떠오르기라도 하면 멋진 글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 동안 마음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질 것 같았다.
백야의 신비를 간직한 북유럽은 길고 혹독한 겨울로 악명 높다. 긴 겨울 덕분인지 예술가들 중에는 북유럽이나 러시아 등 추운 지방 출신이 많다. 외부와 단절된 혹독한 시간의 터널을 지나면서 자신의 내부로 깊이 침잠한 채 고독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낸 결과물이 음악으로, 그림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작품으로 탄생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강원도에서 긴 겨울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는 젊었을 때라 그랬는지 혹독한 겨울이 힘들었다. 해가 일찍 지면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고 대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해가 있는 낮에도 매서운 추위는 기승을 부렸고 감히 외출은 생각도 못 할 정도의 혹한은 마음마저 얼어붙게 했다. 흰 눈이 쌓인 어둑어둑해진 겨울 오후,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어 그 시간을 견뎠다. 이마저도 지치면 방바닥에 배를 깔고 따뜻한 유자차 한 잔과 함께 책 속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에서의 긴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
봄에 움트기 시작한 생명은 여름에 찬란한 초록으로 절정에 이른다. 들뜬 마음으로 보내는 봄과 분주한 여름이 지나면 충만한 계절 가을이 온다. 한 숨 쉬어가는 계절이 오면 생명은 어김없이 착실한 결실을 가져다준다. 계절의 끝자락, 겨울에는 모든 게 끝나고 텅 빈 무의 시공간만 남는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긴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사계절의 마지막이자 냉정하게 자신과 마주하는 계절이다.
차분하고 한적한 이 계절에는 생각이 많아진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어둠이 일찍 내려앉는 날이면 고독은 좋은 친구가 된다. 뜨거운 커피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갈 때의 그 느낌도 겨울이 최고다. 눈이라도 내리면 마음의 등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오래된 삶의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보며 나만의 추억에 잠시 젖어 본다. 겨울에는 나무도 가던 길을 잠시 멈춘다. 온전히 나목(裸木)이 되어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맨몸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오직 진실만을 보여주겠다는 결기로 매서운 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안으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성장을 멈추고 다가오는 봄의 생명을 잉태할 준비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여름보다 겨울을 더 사랑하게 된 건 이런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겨울, 홀로서기를 두려워 않고 조용한 성찰의 시간을 갖고 싶다. 한겨울 나목처럼 모든 것을 벗어놓고 발가벗은 진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싶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성장 대신 성숙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다. 겨울나무가 그러하듯이.
비가 그치면 이제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될 것이다. 맹렬하게 퍼붓는 비는 다가올 계절에 대비하라는 자연이 보내는 사전예고다. 겨울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계절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계절이 아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정성과 품이 들어간다. 아직은 가을과 겨울의 애매한 경계에 있지만 곧 맑고 찬 대기 속에 뽀얀 입김이 올라오는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이다. 내 마음도 겨울 대기처럼 차고 맑았으면 좋겠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