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그 자체로 애틋하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의 이야기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생명체를 키우는 일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 어머니 덕분에 우리 집에는 흔한 화분 하나, 집 지키는 개 한 마리 없었다. 요즘과 달리 내가 어렸을 때는 개가 식용(食用)이거나 방범견에 불과한 천덕꾸러기 신세였음도 개를 가까이 두고 기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털이 하얗고 바둑알 같은 눈망울을 가진 복스러운 강아지가 보드라운 헝겊에 쌓인 채 우리 집에 도착했다. 길고 하얀 속눈썹과 탐스럽고 윤기 흐르는 털은 ‘족보가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종’이라는 뜻을 가진 ’ 잡종’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귀여운 외모에 걸맞은 ‘몽실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한 번도 개를 키워본 적이 없었던 우리는 여린 생명체의 생경한 느낌이 낯설고 두려웠다. 따뜻하고 몰캉한 강아지의 살과 뼈가 내 살갗에 닿는 느낌은 생소하기만 했다. 화들짝 놀라 안고 있던 몽실이를 몇 번이나 바닥에 떨어뜨린 건 그래서였다. 몽실이는 집안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말썽을 피웠다. 아무 데나 똥오줌을 싸는 건 기본이었고 풀어도 풀어도 무궁무진한 두루마리 휴지는 장난감의 신세계였다. 가족들의 소지품이 사라지는 바람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꼬리 치고 달려들며 성가시게 굴었지만 무언가를 요청하는 듯한 그 선한 눈빛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몽실이는 보는 이를 그 자리에서 무장해제시켜 버렸고 어느새 몽실이에게 마음의 곁을 모두 내어 준 나를 발견했다.


어린 시절 몇 년을 식구처럼 지냈던 몽실이는 사정이 생겨 결국 다른 집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몽실이를 떠나보내던 날, 내 속 어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펑펑 울었다. 이별 후에도 몽실이의 동그랗고 선한 눈망울이 떠오를 때면 가슴 한쪽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물과의 관계 역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아프게 깨달았다.


요즘은 반려동물 한 두 마리 키우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로 개 혹은 고양이와의 동거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1인 가정이 늘고 자녀들과도 오랜 기간 유대관계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반려동물은 외로움과 공허를 채워줄 좋은 친구임에 틀림없다. 각종 SNS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일상과 그 옆에서 흐뭇하게 엄마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와 관련한 영상이 엄청난 조회수를 자랑하는 것은 반려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를 키운다는 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육체적인 노동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깊은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밥 주고 재워주는 것 만으로는 제대로 키운다고 말하기 힘들다.


반려 동물을 키우는 수고로움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애당초 개나 고양이를 키울 마음을 먹지 않았다. 결혼 후 세 아이 육아에 지쳐 작은 화분 하나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어떤 생명체에게도 관심을 가질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2018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유기동물은 모두 12만 1,077마리로 조사됐다고 한다. 한 달에 1만 마리 이상이 버려지는 셈이다. 특히 명절이면 버려지는 반려견이 급증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랑’ 이란 단어를 수없이 입 밖으로 내뱉지만 정작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생명을 쉽게 유기하기도 한다. 너무 쉽게 폐기 처분되는 그들의 사랑에도 '사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한 번 쓰고 가볍게 버려지는 일회용품과 다를 것이 있을까? 주인에게 버림받은 동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되어 새로운 주인을 찾아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고 한다. 동물도 사람과 똑같이 상처 받고 마음을 다친다.


소설가 정유정이 어느날 밤, 누군가 유튜브에 올린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한 듯 살려달라 날뛰고 울부짖는 돼지들의 울음소리와 비명, 산 채로 묻힌 이들의 울음소리는 다음날 아침까지도 지상으로 울려 퍼졌다고 했다. 이 밤 이후로 작가의 머릿속에는 죽어가던 돼지들의 비명과 함께 질문 하나가 자리 잡았다.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 이를테면 개와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 전염병이 돈다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질문에 대한 그녀 자신의 답은 인간은 반려동물에게도 가축에게 했던 짓과 똑같은 짓을 할 것이라는 암울한 결론이었다. 소설 <28> 이 잉태된 배경이다.


소설은 서울 인근의 소도시 ‘화양’을 무대로 개와 사람들에게 눈이 빨갛게 변하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병의 진행속도는 무척이나 빨라 개와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고 화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된다. 언제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은 공포 그 자체다. 전염병의 매개체가 된 개는 더 이상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던 ‘반려견’ 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자 ‘공공의 적’으로 전락한다.


작가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화양시에서 충돌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전염병의 숙주로 '개과(科) 동물'이 의심되자 모든 개를 무자비하게 살처분해서 생매장하는 장면은 구제역 파동, AI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 전염병이 유행할 때의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한낱 미물에 불과하지만 엄연히 생태계의 한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해 '악'으로 규정된 이상 그 생명체가 받아들여할 운명은 무자비한 폭력과 무차별적인 살상뿐이었다.


반려견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이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개과(科) 동물'의 씨를 말리는데 혈안이 되어버린 인간의 독선은 도를 넘어선다.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 양심 부재의 화양시는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오직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삶만이 중심에 있을 뿐, 다른 생명체의 삶과 존엄에 대한 관심은 잊혀진 도시 화양과 함께 매장되었다.


소설 <28>은 편견과 선동에 휩쓸려 개들을 혐오대상으로 낙인찍은 후 헌신짝처럼 버린 ‘개만도 못 한’ 인간들의 이야기다. 이기심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은 그동안 개들과 맺었던 관계를 파기하고 스스로 ‘짐승’ 이 되었다.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타자’로 규정하고 인간이 정한 경계선 밖으로 매몰차게 쫓아버리는 행위는 스스로를 ‘비인간’ 화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한다. 소설은 ‘개’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역으로 ‘인간다움’에 대해 냉정하게 묻는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대상을 가려 사랑을 주지만 반려동물들은 나와 연을 맺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 없이 사랑을 준다. 이유를 묻지도, 재거나 따지지도 않는다. 살면서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등의 말을 표현해야 할 때가 있지만 괜히 낯 간지럽고 부끄럽게 느껴져 말을 아끼게 된다. 반려동물은 다르다. 망설임이 없다. ‘너를 사랑해’ ‘고마워’라는 감정을 그때그때 즉시 표현한다. 꼬리 치고 달려들며 주인을 반기는 행위는 말하지 않아도 ‘사랑’ 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몽실이’라는 작은 생명을 지켜보면서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몽실이를 떠나보내며 ‘성장’이라는 통과의례도 거쳤다. 작은 강아지와 주고받은 사랑의 언어는 몸속에 각인되었고 함께 울고 웃으며 뒹구는 동안 ‘종’이라는 구별 없이 ‘생명’이라는 그 자체 만으로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되어 세 아이를 사랑으로 키운 힘의 일 할은 어쩌면 몽실이라는 작은 생명체와의 관계 속에서 잉태된 사랑의 유전자 덕분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는 내가 받은 사랑으로 또 다른 생명을 키울 준비를 하게 된다. ‘생명’이란, ‘살아 있음’ 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를 빚지는 일이다.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생명은 그 자체로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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