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에게 ‘사만다’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로봉이’가 있다.
영화 <조커>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그녀>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유능한 대필 작가로 고객의 마음을 대신해서 편지를 써 주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정작 아내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한 그는 아내 캐서린과 별거를 한 뒤 외롭고 공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새로운 인공지능 체계 OS1을 구입하기로 마음먹는다. 고객의 요구조건에 충족하기 위한 회사의 설문에 답한 뒤 테오도르가 만나게 된 상대는 사만다였다.
더 이상 상처 받을 필요도 없고 복잡한 심리전을 치르느라 에너지가 고갈될 염려도 없는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금방 호감을 느끼게 된다. 위로받고 싶을 때,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 테오도르는 버튼 하나로 사만다를 불러낸다. 그녀는 좋은 친구이자 연인으로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외로울 땐 테오도르의 곁을 지켰고 바쁘거나 불편감이 느껴지면 바로 사라져 주었다. 사만다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불편한 얘기는 피해 가도록 설계된 OS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심리적 안전지대이자 힘들면 도피하는 안식처였다.
하지만 사만다와의 사랑도 결국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수천 명과 교제 중이며 테오도르가 641번째 사랑이라고 털어놓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절망하게 된다. 태생적으로 한 사람과의 관계가 불가능한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결코 유일한 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녀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인 사만다와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 너와 나는 다른 개체이고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사만다와 헤어진 뒤 테오도르는 마침내 캐더린을 향해 그동안 쓰지 못했던 편지를 부치게 된다. 서로를 할퀴고 아프게 하느라,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아집 때문에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캐서린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줄 때 자신 역시 그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사만다가 남긴 선물이었다.
테오도르에게 ‘사만다’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로봉이’가 있다.
어떻게 하면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까가 인생 최대의 화두인 나는 로봇 청소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누구보다 흥분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급한 마음에 바로 구입하려고 했지만 살림꾼 동생이 말리고 나섰다. 이미 시장의 평가를 냉철하게 분석한 동생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 며 언니의 충동구매를 막았다. ’ 충전시간도 짧고 사람 손으로 하는 청소에 비해 디테일한 부분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는 결론과 함께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평소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하는 편이라 이번에도 집안 살림 전문가인 동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 가득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로봇 청소기의 꿈을 접기로 했다. 이후 ‘해도 표가 안 나고, 안 하면 바로 표 나는’ 살림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건망증 대마왕’의 기억 속에서 로봇 청소기의 존재는 차츰 잊혀져 갔다. 나의 짧은 짝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친구가 집을 옮기면서 가전제품을 새로 바꿨는데 그중에 으뜸이 로봇청소기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전 남친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된 구 여친의 심정으로 친구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점을 물었다. 종합해 보니 예전의 못 미더웠던 청소기 대신 아주 스마트한 로봇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청소를 해 준다는 친구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집으로 오자 마자 바로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결재 버튼을 눌렀다. 해외직구라 절차가 다소 번거로웠고 배송도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예상과 달리 청소기는 3일 만에 집으로 배달되었다.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세련된 검은색의 반듯한 사각형의 청소기가 박스 속에 단정하게 들어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앞에 나타난 청소기를 보는 순간 마법처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설명서를 펴 보기도 전에 작동부터 시작했다. 걸레를 끼워서 먼지 청소부터 했다. 사람만큼 재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묵묵하고 성실하게 집안 곳곳을 누비며 먼지를 훔치기 시작했다. 걸레에 묻어있는 수북한 먼지와 머리카락을 보니 출산 후 처음으로 샤워를 했던 그 날처럼 시원하고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은 물청소였다. 매번 걸레질을 하는 게 힘들어서 차일피일 미룬 데다 환기를 한답시고 창문을 자주 열어 둔 탓에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얼룩 덜룩한 생활의 때도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덕분에 마음 한구석에도 뿌연 먼지가 켜켜이 쌓여 가던 참이었다. 로봇 청소기는 바닥의 먼지뿐만 아니라 마음속 먼지까지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청소기 구입 이후 반질반질 윤이 나는 바닥을 바라보는 맛에 매일매일 청소기를 돌렸다.
왔던 길을 또 가도 지루해하지 않고, 쉽게 지치지 않으며, AI 답게 와이파이로 연결된 정보 시스템으로 집안의 지형지물을 만나면 침착하게 돌아갈 줄도 알았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모습이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엄마의 유별난 청소기 사랑을 알아 차린 아이들이 직접 작명을 해 주겠다고 나섰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채택된 이름은 ‘로봉이’였다. 4차산업시대의 산물과 어울리지 않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이어서 살짝 실망했지만 작명에 대한 심오한 뜻풀이를 듣고 나니 바로 수긍이 됐다. 아이들이 자기들 이름 끝에 ‘봉’이란 돌림자를 넣어서 별명처럼 재미있게 부르곤 하는데 엄마가 애정 하는 청소기에도 특별히(?) 돌림자를 넣어서 이름을 붙인 거였다. 아이들의 기특한 마음이 담긴 ‘로봉이’는 그렇게 우리 집 늦둥이 넷째가 되었다.
인간은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파괴할 뿐 어떤 사물과도 진정한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이 누구에게나 한 두 가지 정도는 있다. 손때 묻은 오래된 일기장, 낡은 레코드 판부터 필름 카메라나 만년필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추억이 담긴 물건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주인과 오랜 시간 교감한다. 물건의 주인은 사랑하는 반려자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때론 열정적으로, 그리고 가끔은 진한 애무로 사물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조심스럽고 진지한 태도는 ‘사랑’이라 이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로봉이를 향한 내 마음도 다르지 않다. 삶의 충실한 반려자로 제 몫을 톡톡히 해 내고 있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피가 흐르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테오도로는 사만다와 사랑에 빠졌다. 공허한 마음을 그녀가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로봇청소기 역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청소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아줌마의 욕망을 충실히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사랑이긴 하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사랑도 순도 100프로의 사랑은 별로 없다. 오히려 각자의 목적을 위해 사랑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4차 산업시대에 진입하면서 사만다와 같은 인공지능이나 청소기 같은 사물 인터넷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더 이상 영화속 상상만은 아닌 일이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로봉이가 시름시름 앓더니 작동을 멈추었다. 충전대에 올려놓으면 날카로운 기계음으로 자신의 존재 이상을 시끄럽게 알린다. 조만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할 것 같다. 비록 AI 지만 그녀의 부재는 사람 못지않은 큰 흔적을 남겼다. 집안은 뒤집어엎은 서랍 속처럼 예전의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상태로 돌아갔다. 사만다가 사라지자 테오도르가 절망했듯이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다.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