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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25. 2018

우리 기쁜 젊은 날 - 겨울나그네

-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



대학에 입학한 뒤 방황만이 청춘과 젊음의 특권인양 방탕한(?) 생활을 2년 정도 하고 나니

그것마저도 지겨워졌다. 애초에 적성과는 먼 전공을 택한 이유로 전공으로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전공 공부는 아예 접은 채 인문대학을 기웃거리며 영문학과 미술사 등으로 강의 시간을 채웠다.


그 해 겨울,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군 입대를 했고 여자 동기들은 전공 공부에 매진하느라,

혹은 유학 준비를 하느라 도서관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차피 내 갈 길은 아니라고 쿨하게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3학년이 되니 진로에 대한 불안이 밀려왔고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레코드 가게를 기웃거리다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

LP 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LP판이 아날로그 적인 삶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품으로 재평가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턴 테이블에 LP판을 얹어서 음악을 듣던 것이 일상적인 시대였다.     



우울하고 막막한 내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생각이 들어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그리고 그 겨울 내내 <겨울나그네>를 듣고 또 들었다.

가사의 의미를 굳이 알지 못해도 굵은 저음의 바리톤은 마음을 울렸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우울하고 무거운 음악을 벗 삼아 아래로, 아래로 깊이 침잠한 채

고독과 함께 그 시간을 견뎠다.    






잘 알려진 대로 <겨울 나그네>는 독일의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uller, 1794~1827)의 시집에 곡을 붙인 것이다.


슈베르트는 뮐러의 <겨울 나그네>의 스물네 편의 시 하나하나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은 아마도 Limdenbaum(보리수) 일 것이다.     




성문 앞 샘물 곁에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네    






슈베르트의 가곡 Limdenbaum(보리수)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영화, <겨울나그네>는 이제는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입시를 마친 고3 막바지, 우리는 해방감에 들떠 있었고 작은 일탈로 그동안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다.


학생주임 몰래 반팅을 하고 소개팅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관에서 성인들의 은밀한 세계를 미리 경험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강석우, 이미숙, 안성기 주연의 <겨울 나그네>는 내가 고3이던 그 해 개봉했다.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19금이었던 이 영화를 관람했다.    

 

고 곽지균 감독의 데뷔작인 <겨울 나그네>는

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운명 속에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던 의대생 민우(강석우)와 음대생 다혜(이미숙)가 부딪치는

고전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은 연세대 캠퍼스 윤동주 시비에서 문과대학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한다.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라면 한 번쯤 가야 될 것만 같은 낭만적인 장소였다.

다혜와 민우라는 순정만화 속에서 튀어나옴직한 이름도 이 장면을 더욱 로맨틱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우와 다혜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민우가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된 후 다혜를 떠나 기지촌으로 흘러들어가게 되고,

다혜는 하염없이 민우를 기다린다.

끝나지 않는 민우의 방황으로 빈자리에 평소 다혜를 짝사랑하던 선배 현태(안성기)가 다가간다.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는 제니(이혜영)는 민우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아이를 낳는다.


다혜를 잃은 민우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고 결국은 죽음을 택하고 만다.  




   


어긋난 사랑과 욕망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 청춘의 고뇌와 쓸쓸함이 담긴 애잔한 영화였다.



영화 전반에 흐르던 슈베르트의 음악과 스산한 겨울 풍경은
고독과 우울의 냄새로 가득했던 그 해 겨울과 닮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슴 한편에서 찬 바람이 일었다.     



청춘과 고뇌의 아이콘이었던  강석우는 어느덧 찌질하고 망가진 중년의 역할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중견 배우가 되었다.

긴 생머리로 첼로를 연주하던 순수와 청순의 대명사, 이미숙 역시 세월을 피해가지 못했다.     



영화 속 민우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돌이킬 수 없는 먼 길을 가 버린 민우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겨울 나그네처럼 외로이 방황하는 존재로 살다가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 되었다.  


 


  



살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느낄 때가 있다. 바로 잡을 수 없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와 버린 막막함에 운명을 탓하게 된다.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쳐도 결국은 덫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오이디푸스 왕처럼 운명 앞에 선 인간이란 존재는 한없이 미약하기만 하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옛날을 말하던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기쁜 우리들의 젊은 날은 저녁놀 속에 사라지는 굴뚝 위의 흰 연기와도 같았나니     


- 최인호 겨울 나그네 중에서 -    




누구에게나 찬란했던 기쁜 젊은 날이 있었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절망하고, 시대의 아픔에 번뇌했지만 청춘의 시간은 아름답고 순수했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은 데모와 최루가스로 얼룩진 암울한 나날이었다.


방황하던 청춘들에게 슈베르트는 감정의 사치였고 낭만은 더 이상 대학 캠퍼스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곽지균 감독은 <겨울 나그네>를 통해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 편의 꿈과 같은 낭만과 그리움을 심어 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겨울이면 떠오르는 이 영화는 아직까지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1986년에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현태와 다혜 부부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민우의 아이는 이들 부부가 계속 키우고 있을까.

미국 남자를 따라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떠난 기지촌 여자 제니는 민우의 아이를 잊지 못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마저 여기를 떠난다면 현태와 다혜의 삶에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모두 사라져 버리니까.

두 사람의 삶에 남아 있던 희미한 청춘의 그림자마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니까...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현듯 내가 다녔던 대학의 캠퍼스를 떠올리게 될는지 모른다.

낙엽이 하나 둘 날리는 가을의 대학 교정은 사랑하기 좋은 곳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기억을 소환해서 그리웠던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본다.    

다혜와 현태가 민우의 순수했던 젊은 날을 영원히 기억하듯 내 젊은 날의 추억 한 조각을 조심스럽게 꺼내 본다.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리워하는 마음만은 잃고 싶지 않다.   


  

감독과 작가가 모두 이제 고인이 되었다.
사람은 죽고 없지만 작품은 오래도록 남아 우리 기쁜 젊은 날을 추억하게 해 준다.
상처로 얼룩진 고통스러웠던 나날일지라도 청춘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찬란한 빛이다

비록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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