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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Dec 15. 2019

뜬금없는 사랑고백이 되어 버렸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전 교수이자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클래식 음악 마니아다. 특히 첼로 소리를 좋아한다. 


“내게 진정한 위로는 ‘첼로’다. 물론 여성 첼리스트가 연주할 때만 그렇다. 연주가 시작되면 난 그녀의 첼로가 된다. 그녀는 날 꼭 껴안고 연신 쓰다듬으며 위로한다. 그렇다고 마냥 안겨 어리광만 부리게 놔두지는 않는다. 살짝살짝 꼬집는 피치카토의 자극도 있고, ‘방귀소리’로 놀리는 글리산도의 유머도 있다.” 


책을 읽다가 빵 터졌다. 첼로를 이렇게 묘사한 사람은 진정 첼로와 사랑에 빠진 연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렇듯 맛깔나게 글을 잘 쓴다. 고품격 아재 개그에 진즉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나는 그의 신간이 나오는 즉시 구입해서 읽었다. 혼자 키득 거리며 김정운식 수다에 빠져 있는 동안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웃기기만 한 글은 물론 아니다. 문화 심리학자답게 사회문제를 인간 심리와 결부시켜 술술 풀어낸다. 명쾌한 해석에 머리가 절로 끄덕여진다. 


어느 날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고 교수직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다소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자기가 조르바도 아니면서 ‘자유’라는 허무맹랑한(?) 가치를 좇아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거였다.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거니 했다. 그런데 이 남자, 진짜 교수직을 그만두더니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라는 정체불명의 연구소를 차리고 소장이 되었다. 학위 받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독일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힘들게 딴 학위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후 50대가 된 그는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더니 덜컥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한동안 그의 글을 읽을 수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년 후 그는 진짜 미술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나름 화가’라고 주장하며 다시 나타났다. 아마추어의 그림이려니 했던 생각과는 달리 그의 그림에서는 진한 프로의 향기가 느껴졌다. 이제 그는 그림마저 잘 그린다. 작품의 가장자리에는 ‘오리 가슴’이라는 이상 야릇한 낙관이 찍혀 있다. 평소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그였기에 수상쩍은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어설픈 상상과 달리 오르가슴에는 육체적 오르가슴만 있는 게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정신적 오르가슴을 느끼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선언이라고 하니 금방 또 수긍이 됐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다. ‘오리 가슴’이라는 낙관이 찍힌 원색의 그림은 자신을 표현하는 김정운만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한동안 또 소식이 잠잠해서 궁금했던 차에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김정운의 여수 만만’ 이란 칼럼을 발견했다. 숨은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뻤다. 혼자서 키득거리며 칼럼을 읽는 동안 글의 매력에 푹 빠져서 매주 칼럼이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정도다. ‘김정운의 여수 만만’은 서울을 떠나 여수, 거기서도 배를 타고 더 들어가야 하는 여자만(하필 또 여자만이라니~~) 이란 섬의 바닷가 바로 옆 미역 창고를 개조해서 작업실을 만들고 거기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거였다. 작업실의 이름은 ‘미역(美力) 창고!’ 절묘한 작명이다. 이래저래 기분 좋게 사람을 당황시키는 이 분,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아껴가며 읽었던 조선일보 칼럼이 한 권의 책으로도 나왔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가 그것이다.


여수에 미역 창고를 짓고 눌러앉게 된 사연과 섬에서의 삶을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이미 칼럼으로 모두 읽었지만 팬심으로 책을 또 샀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에세이지만 문화 심리학적 지식도 쏠쏠하게 얻어 갈 수 있는 일거양득의 책이다. 미역 창고 보수 공사 때문에 돈이 떨어져 선인세를 받았다는 저자의 말에 미역 창고 공사에 벽돌 하나라도 얹은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슈필 라움(Spielraum), 우리말 번역으로는 ‘주제적 공간’이다. 독일어 ‘놀이(Spiel)’와 ‘공간(raum)’ 이 결합되어 생긴 단어로 놀이 공간, 나아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사진을 보니 정말 멋진 슈필 라움이었다. 곧바로 초라한 내 슈필라움이 떠올랐다. 지저분하게 쌓인 책과 노트, 필기도구, 노트북이 올려져 있는 작은 책상이 내 슈필라움이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퇴행적 행태를 보인 사람들만이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았다”고 주장한 심리학자가 있다. 브루노 베텔하임이다... 베텔하임은 이 같은 퇴행적 행동이 일어난 이유를 ‘슈필라움’ 의 부재로 설명한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수용소의 삶이 수감자들을 어린아이와 같은 퇴행적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때 슈필라움은 ‘심리적 여유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지킬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뜻한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모든 물리적 공간이 박탈된 유대인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할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이 두 가지뿐이라는 것이다.


물리적 공간의 부재는 곧 심리적 공간의 부재로 이어진다. 일체의 프라이버시가 허용되지 않는 수용소에서 슈필라움은 사치였고 슈필라움을 상실한 이들에게 삶은 곧 의미 없음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그는 여수라는 낯선 장소에 정착한 뒤 뒤늦게 공간, 즉 슈필라움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의 앙상블’이라고 정의 내린 뒤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라고 못을 박았다. 공간은 그저 비어 있고 수동적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인간의 상호작용에 개입하고 의식을 변화시킨다. 공간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긴다.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이 생기고 봐줄 만한 매력도 생긴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고 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고 문을 잠그기 시작하는 것은 주체적 개인으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인정해 달라는 인정투쟁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슈필라움’ 이라는 개념에 꽂히고 말았다. 내가 왜 그렇게 공간에 집착했고 공간이 없을 때는 노트북을 챙겨 카페의 작은 테이블이라도 차지해야 숨을 쉴 수 있었는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품격을 지키고 싶었던 거였다. 자신만의 슈필라움을 확보는 그는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인생을 새로 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수 미역 창고에서 지내는 동안 이 분, 어느새 시인이 되셨다. 책 중간중간 원고지에 직접 적은 짧은 글은 미역 창고에서 건져 올린 사색의 알곡들이었다. 


미역 창고는 아니더라도 다시마 창고라도 나온 것이 있으면 당장 여수로 달려가고픈 심정이다. 타고난 ‘마스크’라고 자꾸 강조하지만 실상은 그저 그런 외모에 머리숱 적고 키마저 작은 이 남자가 왜 자꾸 멋있어 보이는 걸까? 쓰고 보니 뜬금없는 사랑고백이 되어 버렸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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