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불쑥 침입한 비둘기 한 마리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바쁜 출근길, 횡단보도를 막 건넜을 무렵 발아래 시커멓게 드러누운 비둘기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흠칫 놀랐지만 곧바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비둘기지만 사체를 보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비둘기 생각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둘기가 내 삶 속으로 불쑥 들어온 날이었다.



어린 시절 겁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상상력마저 풍부해서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공포와 두려움을 가득 넣은 풍선은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세상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으며 사소한 균열도 삶을 망가뜨릴 만큼 충분히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수업시간에 문제를 못 풀어서 친구들 앞에서 창피당하는 건 아닐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길거리의 덩치 큰 개한테 물려 죽으면 어쩌지? 현실적인 불안부터 비현실적 공포와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어린이다운 상상력이 날개를 활짝 핀 날이면 삶의 불안과 공포에 압도당해 내 삶은 말린 생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비현실적인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젊었을 때는 취업 걱정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었고 결혼 후에는 자식 걱정, 경제적인 문제 등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종류만 바뀌었을 뿐 삶의 불안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불안과 두려움이 개인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상상과 달리 그 불안이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날 때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쉽게 불안에 잠식당한다.



혼밥, 혼영, 혼술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은 익명성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고자 하는 몸짓이다. 파트리크 쥐스퀸트의 소설 <비둘기>의 주인공 조나단 노엘도 철저하게 혼자만의 삶을 추구한다. 가족도 친척도 없으며 이웃과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그는 익명성 속에 숨어 철저하게 혼자이길 고집한다.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오십 평생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조나단 노엘은 은행에서 30년 넘게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침이 되면 출근 준비를 한 후 은행으로 달려가고 퇴근할 때는 빵과 소시지를 사 가지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작고 소박한 방이지만 조나단은 행복하다. 30년 동안 침대를 한 번 바꾸었고 카펫을 새로 깔았다. 소소한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책을 꽂기 위한 선반도 침대 머리맡에 매달았다. 초라한 방이지만 이 곳은 노엘에게 왕국, 그 이상이다. 같은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을 화장실 앞에서 맞닥뜨린 25년 전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삶의 평화가 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외부와 격리된 삶을 살고 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의 공간 속에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혼자만의 삶을 고집한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잔금만 치르면 작은 방은 이제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될 터였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이어오던 그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노엘의 삶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사건은 1984년 8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조나단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한 걸음 내밀던 그 순간 복도를 점령한 무단 침입자가 눈에 들어왔다. “문지방에서 불과 2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의 창백한 역광을 받으며 있었다. 납 회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의 타일 위에, 빨간색이며 갈퀴 발톱을 한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둘기였다.”



비둘기 한 마리를 목격한 것뿐인데 그 순간 이후로 조나단의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카락이 빳빳하게 섰고 방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을 접고 후다닥 방문을 걸어 잠근다. 가슴은 방망이질 쳤고 몸에는 식은땀까지 흘렀다.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웬 호들갑이냐고 하겠지만 조나단은 방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세면대에서 소변을 해결한다. 걱정과 불안으로 비약된 상상력은 급기야 비둘기 떼에 둘러싸여 질식당하고 정신병자로 몰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이른다. 비둘기를 쫓아내지 않으면 애써 마련한 보금자리가 망가질 거라는 온갖 상념이 거대한 파도처럼 머릿속을 휩쓸었다. 결국 조나단은 가방을 싸서 필사적으로 건물을 빠져나온다.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조나단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자신에게만 허락된 낙원은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비둘기 한 마리로 상징되는 사소한 균열이 우리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작은 변화가 현대인들을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는지 조명하고자 했다. 익명성 속에 숨어 평화와 안위를 찾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도 섬세하게 그려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을 지키는 경비원이었던 조나단은 자신의 삶 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집에서 도망쳐 나와 호텔방에서 지친 몸을 누인 그는 “내일 자살해야지”라고 되뇌며 잠이 든다. 하지만 다음날 조나단은 영원히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간밤에 비가 내려 길거리는 곳곳에 물웅덩이가 패어 있다. 어제까지의 조나단이었다면 당연히 웅덩이를 피해 갔겠지만 오늘의 조나단은 조금 다르다. 그는 “신발과 양말을 훌러덩 벗어 버리고 맨발로 가고 싶은 강한 충동을”을 느꼈다. 신발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웅덩이의 물을 발로 차며 걸었다.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단절된 삶은 편해 보일지 몰라도 정신은 서서히 죽어간다. 작고 보잘것없는 아파트에 자신을 가둔 채 타인과의 교감을 포기하고 지켜낸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피하기보다는 맞서 싸울 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고통을 피하지 않기로 한 그는 비로소 ‘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응하겠다는 의지는 삶의 주도권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다. 삶의 주도권을 외부로 넘겨서는 안 된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은 삶은 소중한 내 삶을 함부로 외부에 이양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던 유토피아였던 방은 실상은 암울한 디스토피아였다. 이제 그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안식과 평화의 공간을 빠져나와 온갖 고통과 상처의 근원지인 문 밖으로 눈을 돌린다.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광장으로 용감하게 발을 내딛는다. 호텔방에서의 결심대로 그는 자살하지만 그가 선택한 죽음은 신체가 아니라 정신의 죽음이었다. 익명성 속에 숨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허술한 자존감 대신 비록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따를지라도 타인과의 소통 속에서 느끼는 자유를 선택하기로 한다.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이제 거대담론에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을 재현하는 문학은 작고 사소한 것,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거창한 이데올로기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외롭고 소외된 개인, 삶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작고 평범한 이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문학이 사유의 시발점이 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비둘기’는 무엇일까? 일상에 불쑥 침입한 ‘비둘기’ 앞에서 나는 과연 초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