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합니다
지옥 같은 회사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당신은 급기야 원형탈모 증세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3년 전 입사한 회사의 팀장은 독선적이고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능력은 있었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폭언도 서슴지 않았으며 부하 직원을 개인 비서 부리듯 했습니다. 부서의 신입이자 막내인 당신은 팀장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 견디기에 급급했습니다. 출근과 동시에 상사의 기분부터 체크하는 것이 루틴이 될 정도였습니다. 맑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흐리거나 비가 올 경우 잔뜩 긴장하고 위축되어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잦아졌고 그때마다 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더 긴장해서 2차, 3차의 어이없는 실수까지 저지르고 나면 당신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밀려왔습니다.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고 분노와 우울감에 휩싸였습니다. 팀장은 유독 당신에게 더 가혹했습니다. 성격이 온순하고 무던한 당신은 팀장의 요구를 묵묵히 들어주었고 상사의 행동은 점차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업무와는 무관한 잡무까지 당신에게 넘길 때면 수치심에 괴로웠습니다. 취준생의 위치에서 직장인으로 신분상승을 한 것만 같아 날아갈 듯했던 기분도 잠시 현실은 지옥이었습니다. ‘이러려고 내가 머리 싸매고 취업준비를 했나’ 싶어 밤잠을 설치는 날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처음에는 팀장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회식을 할 때는 팀장이 좋아하는 메뉴의 식당을 안내했고 차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해외여행을 가는 친구에게 부탁해 고급 차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주말마다 골프 라운딩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골프 학원에 등록해 레슨도 받았습니다. 열심히 연습해서 어느 정도 실력을 쌓은 후 팀장을 위해 골프장을 예약해서 함께 라운딩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정노동에 지쳐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나면 당신의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습니다. 주말까지 반납한 채 원치 않는 라운딩에 벌겋게 충혈된 눈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버스에 오르는 날이면 회사가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한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지적과 잔소리를 무한 반복하는 팀장과의 동거는 당신의 삶을 점차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팀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지만 돌아오는 건 여전한 무시와 냉대였습니다. 노력하면 언젠가는 진심을 알아주겠지라는 희망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당신은 모든 노력을 그만 두기로 합니다. 상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기로 결심합니다. 묵묵히 듣고 시키는 일만 소극적으로 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던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팀장은 날이 갈수록 기고만장해져서 조그만 실수에도 불같이 화를 내며 당신을 닦달하기 일쑤였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의사결정은 기본이고 질책인지 인신공격인지 경계가 모호한 상황을 견뎌야 하는 순간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당신의 존재는 그림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길 자청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입이라 일이 서투른 탓에 업무파악이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팀장이 미리 파악하지 않았다면 더 윗선에서 질책을 당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팀장 선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크다고 느꼈기에 어디에도 함부로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회사를 떠나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도 당신이 무던히 참고 견딘 이유였습니다. 회사에 잘 적응해서 승진하기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족들이 원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처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신입인 당신의 눈에 비친 상사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당신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사를 고발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대처가 부적절할 경우 직장 내 당신의 위상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팀장의 확인이나 인정이 없으면 업무를 수행하기 조차 힘겨워졌습니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스스로를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이 당신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가로막았습니다. 가혹한 스트레스를 홀로 감당하느라 우울과 불안을 달고 살았습니다.
당신의 상사는 자신은 특별하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한 과장된 느낌과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타인이란 자신에게 만족을 주고 찬사를 주기 위한 도구적 존재로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착취하며 거리낌 없이 갑질을 합니다. 성취에 대한 충만감을 느끼기보다는 특권의식에 젖어 들어 갑질을 일상적으로 저지릅니다. 당신의 실수는 말 그대로 실수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업무능력이 향상되면 자연스럽게 실수가 줄어듭니다. 하지만 선을 넘는 행위로 당신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동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팀장의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팀장은 상수입니다. 당신이 변해야 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갑질을 막는 시발점입니다. 당신의 존재를 알려야 합니다. 무턱대고 비위를 맞추거나 자기를 소거시키는 방법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평소 믿고 의지하는 직장동료 한 두 사람에게 당신의 상황을 얘기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들의 경험담과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나아가 직장 내 고충상담 센터 등을 통해 당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도 있습니다. 상사에 대한 험담이 아니라 당신이 심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포인트입니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가해자에게 직접적인 경고도 필요합니다. 더 이상 당신의 경계를 넘어오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고 당황해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절차를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갑질은 멈출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밟아도 죽은 듯이 가만있던 당신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해 받게 된 원형탈모 치료에 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는 것 또한 가해자에 당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계속해서 당신의 경계를 밀고 들어온다면 최후의 수단인 관계를 끊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자기 학대와 불필요한 소모전을 견디면서까지 관계를 지속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로 나를 지키기 위해 끊어내야 할 관계도 있는 법입니다. 그래야 당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생계가 달린 직장문제이니만큼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차일피일 하는 동안 당신의 영혼은 재생 불가능한 상태로 망가질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도 ‘내’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동료와 지인들의 힘을 믿고 그들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소중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