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소파에서 책을 보다가 책상 밑에 굴러다니는 먼지 덩어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순간 당신은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고운 재 같은 먼지가 아닌 덩어리 먼지는 주부의 나태함의 상징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먼지가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덩어리가 되는 시간은 주부의 무관심과 불성실함과 비례한다는 믿음 또한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지는 생각보다 쉽게 쌓입니다. 하루만 청소를 하지 않아도 바닥이 버석거리고 이삼일만 방치하면 양말 밑바닥이 새까매질 정도입니다. 손이 닿지 않는 틈새나 창문틀은 먼지가 서식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잠깐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부엌과 거실, 방을 오간다 해도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먼지는 독버섯처럼 자랍니다.
당신은 주부이기 전에 직장인입니다. 살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몰아서 하거나 대충대충 해 치우는(?) 수준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태생적으로 집안일에 흥미가 없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 당신의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 때면 쪼르르 달려가곤 하는 동생과 달리 당신은 주방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동생은 엄마 옆에 바짝 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의 조수 노릇도 자처하며 일을 거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엄마의 노고 덕분에 완성된 음식을 맛보며 맛이 있네, 없네 품평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엄마는 일손이 필요할 때면 꼭 동생을 불렀습니다. 손이 야무지지 못한 데다 집안일에 대한 흥미마저 현저히 부족한 당신을 데려다 일을 시키는 것은 ‘앓느니 죽는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니 말입니다. 안 하다 보니 점점 하기 싫어졌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와도 학생의 무기인 ‘공부’를 핑계로 얼른 방으로 숨어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가사노동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마주한 아득함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었습니다. 스물네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바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고 안 하면 심하게 티가 났습니다. 신혼집을 예쁘게 관리하고 가꾸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원상복귀를 위해 무한한 노동을 되풀이해야 하는 일에 당신은 금세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굳이 ‘시지프스의 천형’을 운운하지 않아도 충분히 무의미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생겨 육아의 짐까지 더해지자 집안일의 난이도는 최상을 찍었습니다. 가정은 더 이상 편안한 쉼의 장소가 아니라 잠시라도 도피하고 싶은 장소로 전락했습니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집을 벗어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남편이 가사의 일정 부분을 맡아서 하지만 집으로 향하는 당신의 발길은 여전히 무겁기만 합니다. 퇴근 후 또다시 출근하는 직장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입니다. 노력에 대해 어느 정도의 보상이 주어지는 ‘진짜 직장’ 대신 노력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지만 일을 포기할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척이나 큰 직장 말입니다.
가사노동이 힘든 이유는 그 본질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더하는 일이 아니라 원래로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 일을 무한 반복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릇을 닦고, 바닥을 훔치고, 빨래를 하지만 내일이면 어김없이 설거지가 쌓이고 바닥은 버석거리고 옷은 더러워집니다.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유지’를 위해 온갖 에너지를 동원해야 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먼지’와 ‘더러움’이라는 강적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흐트러짐 없이 정리 정돈되어 있지 않은 집안의 주부는 그녀가 가진 다른 무수한 자질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태만과 무능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똑같이 일하고 들어와도 다음날 아침 식단을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여자들의 몫인 가정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고 다독여 보지만 바닥난 체력과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대가를 치르고 나면 문득 삶이 공허해집니다.
직장에서 피곤한 몸으로 퇴근해서 잘 정돈된 집으로 들어서면 편안함이 느껴지고 배우자의 배려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기저기 어질러진 거실과 설거지 그릇이 그대로 쌓인 주방을 대하게 되면 짜증이 밀려오고 배우자의 돌봄을 받지 못한다는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돌봄에 대한 욕구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의 다름 아닙니다. 어지러운 집안에 들어서면 화가 나는 이유는 자신의 이런 욕구가 무시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탓하며 화를 내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여성은 아내로, 남성은 남편이라는 정체성이 추가됩니다. 결혼 전의 자유분방함에서 벗어나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가정을 잘 꾸려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역할분담을 소홀히 할 경우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뭘 해도 배우자가 예뻐 보이는 시기는 딱 6개월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랑의 호르몬은 영원히 분비되지 않습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식사 준비, 설거지, 청소, 빨래에다 아이가 생기면 육아까지 부부가 공동으로 맡아야 합니다. 도와주는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의 수고를, 남편의 고충을 당연시 여기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다 보면 파경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찾아옵니다.
당신은 그동안 집안일의 대부분을 혼자 감당하느라 힘에 부쳤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습니다. 집안일은 여전히 여자의 몫이라는 사회 문화적 편견에서 당신 자신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피곤해 보이면 ‘도와달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고 조금만 ‘도와줘도’ 감지덕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구멍 난 낡은 냄비에 땜질하는 정도밖에 효력이 없습니다. 냄비 바닥은 언젠가는 또 다른 구멍이 날 것이고 그때마다 땜질로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의 남편은 묵묵히 모든 일을 처리하는 당신을 당연하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조금씩 곪아 온 당신의 상처를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를 관성적으로 돌아가는 삶의 일부분으로 여겼을 수도 있으니까요. 집안일 또한 남편의 일이라는 현실인식이 필요합니다. 일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나누고 현실적인 방안을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기꺼이 동참해서 고통을 분담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언어가 됩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유연하면서 책임감 있는 태도가 당신과 당신의 남편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달라도 개선을 위한 대화 없이는 어떤 것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대화를 피하다 보면 갈등은 눈덩이처럼 커지게 됩니다.
당신은 가정을 이끌어가는 주체이자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남편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작은 역할이라도 아이들에게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가정이라는 생태계가 건강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혼자서 희생을 자처하면 분노와 우울의 싹이 자라고 왜곡된 보상심리는 아이들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내가 하고 말지’ ‘앓느니 죽는 게 낫다’는 식의 참고 희생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