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당신은 얼마 전 친구 때문에 마음이 무척 상했습니다. 발단은 친구의 잘못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분노와 억울함으로 마음이 지옥인 상태를 헤매는 와중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는 간략한 내용이었습니다. 문자 하나 받고 바로 풀어질 것이었으면 애초에 그렇게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겠지요. 당신이 문자를 받은 뒤에 금방 답장을 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그 친구에게서 또 다른 문자가 왔습니다.
“내가 먼저 사과했는데 넌 왜 아무런 말이 없니? 사과를 안 받겠다는 거니? 알았어. 그럼 이쯤에서 우리 관계는 정리하자”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문자가 도착합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너와 알고 지내는 동안 나도 많이 힘들었어. 친구로서 마지막 충고하는데 인생 그렇게 살지마!”
당신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졸지에 사과 문자에 응대조차 하지 않은 속 좁은 사람으로 매도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분노를 마음껏 쏟아낸 뒤 충고까지 서슴지 않은 친구의 태도 때문에 당신은 깊이 상처 받았습니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단 3분 등장하고 3천 번의 욕을 먹은 출연자가 있습니다. 배우 박정민입니다. 덕분에 그는 시청자들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배우 박정민이 지금처럼 많이 알려졌을 때는 아니라서 잊힐 법 한 장면이었지만 드라마를 본 많은 사람들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3분의 등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사과의 태도’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드라마 속에서 보라의 전남친으로 등장한 박정민은 보라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보라는 이 사실을 바람난 친구에게서 직접 듣고 괴로워합니다. 나중에 사과를 하러 보라의 동네로 찾아온 그는 실수였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사람이니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이제 드라마 속 상황으로 잠시 들어가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실수였어. 술 때문이야… 내가 그날 왜 그렇게 먹었는지…. 아 그래 뭐 실수라도 잘못 한 거지. 내가 미친놈이지. 진짜 미안해. 한 번만 봐주라. 응?”
“실수? 형이 언제 실수 한 적 있어? 미안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내 상식으로는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못 해. 어떻게 내 친구랑 그럴 수가 있어?”
(보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를 내면서)
“야, 한 번만 넘어가.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넌 실수 안 하냐? 완벽하냐? 하긴 완벽하지. 너 똑똑하잖아. 넌 감정이란 게 있냐? 남자 친구 술 취했다고 집으로 쌩 가 버리질 않나? 너처럼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계집애 처음 봐. 너 사귀면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 이건 뭐 여자 친구가 아니라 얼음 덩어리 이런 거랑 사귀는 거 같아”
시청자들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가해자 주제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그를 백 번 양보해서 참았다고 칩시다. 여기서 멈췄다면 욕은 이천 번만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충고까지 날리는 과감한 행위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너 그 성질머리 못 고치면 아무도 못 만나! 여자로서 최악이야”
정말 남친으로서 최악인 인간입니다. 박정민이라는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대사 하나하나가 가슴에 콕콕 와서 박힙니다. 시청자들 역시 자연스럽게 보라에게 감정 이입해서 함께 분노했을 것입니다. 드라마 속 남친은 가해자들이 으레 그렇듯 변명으로 물꼬를 턴 후 ‘술 때문’이라는 단골 메뉴를 슬쩍 가지고 옵니다. 술은 언제나 만병통치약이니까요. 사람을 죽여놓고도 ‘술에 취해 홧김에’ 그랬다고 하면 정상참작이 되고 성폭행을 저질러도 ‘술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하면 판사님들의 후한 동정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듯했지만 보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같이 화를 내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난 행진곡을 이어갔습니다. 가해자들이 주로 쓰는 ‘미안하다고 했잖아!’를 필두로 그동안 담아 두었던 온갖 말을 시원하게 쏟아냅니다. 어쭙잖은 충고까지 ‘서비스’ 해 준 뒤에야 자리를 뜹니다.
일그러진 표정과 경악으로 점점 커진 보라의 눈은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려줍니다. 배우 박정민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몰아가는 전형적인 방식을 훌륭하게 연기했습니다. ‘나는 분명 사과를 했고, 사과를 안 받아주는 네가 옹졸한 것이고 나도 힘들었다’면서 과거사를 줄줄이 나열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당신이 당한 일이 드라마 속 보라와 전 남친의 사연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을까요?
사과를 받아들이는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가 ‘그래 알았어. 용서할게’라는 말이 바로 나갈 수 있을까요. 사소한 문제인 경우에도 겸연쩍음을 삭힐 시간이 필요한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일을 떠올리면서 피가 거꾸로 쏟는 경험을 한 경우에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사과를 바로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가지는 희망 내지 환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보라는 말했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냐’고. ‘원래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실수라니 무슨 말이냐고’ 대듭니다. 그녀에게도 분노를 식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글부글 끓는 냄비의 불을 끈다고 냄비가 바로 식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서서히 열기가 가라앉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기가 식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제대로 된 사과이고, 기다려 주는 것 까지 모두 사과의 범위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과가 힘듭니다. 하지만 보라의 남친은 참을성이 부족한 데다 염치마저 없었습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남아서 너울거리는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었습니다.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보라 탓을 하며 떠났습니다. 당신의 친구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경우 우리는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요? ‘사과했으니까 됐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재빨리 마음의 짐을 내려놓거나 쿨 하게 받아주지 못하는 상대의 옹졸함을 탓하며 나를 합리화하지는 않았나요. 당신의 친구 역시 사과를 한 게 아니라 사과를 빙자한 자기 합리화를 하느라 당신의 마음은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네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
“기다려주지 못한 나의 옹졸함을 용서해 줘”
“ 내 실수를 마치 네 탓인 양 몰아가서 부끄러워”
당신의 친구가 해야 했던 말은 이런 말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