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얼거리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소슬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병원 입구를 서성일 때였다. 긴박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환자가 도착했고 뒤이어 보호자로 보이는 흐트러진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그녀는 가벼운 바람에도 날려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얬고 중력이 없었다면 두 다리는 땅을 온전히 지탱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반백의 머리에 서둘러 걸쳐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은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쌀쌀한 바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가슴에 숭숭 뚫린 구멍 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슬픔도, 공포도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깊은 절망이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방금 도착한 환자의 엄마였다. 자식이 위독한 상태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는 바스러질듯한 그녀의 모습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고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그녀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던 걸까?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급작스레 도착한 내 불행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고 있는 사이 타인의 불행이 속속 도착하는 그곳은 대학병원 화상병동이다. 둘째 아이가 손에 심한 화상을 입어 입원해 있던 병동에서 나는 불행의 온갖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오빠 친구가 운전하는 차에 탔다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발가락을 절단한 아가씨의 병상을 어두운 얼굴로 매일 찾아오던 청년은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었다. 직장에 다니는 딸을 대신에 손주를 돌보던 할머니가 잠시 방심한 사이 콘센트에 젓가락을 꽂은 갓 돌을 지난 아이는 손가락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오랜 농사일로 허리가 굽고 다리가 구부정하게 휜 할머니는 손주 병시중과 퇴근 후 잠시 들렀다 가는 딸과 사위 앞에서 죄책감으로 허둥댔다. 오랜 노동으로 신체구조가 틀어진 할머니의 기이한 걸음걸이도 기억의 창고 한 켠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커피를 마시려고 끓여둔 뜨거운 물을 전신에 뒤집어쓴 3대 독자 아들의 기막힌 사연과 학원에 불이 나 화상으로 턱 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된 여중생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거울 정도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불행의 종합세트를 통째로 열어본 기분이었다. 누군가의 불행을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는 심신이 힘들었다. 타인의 고통에는 무심하지만 새끼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나의 고통에는 무감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내가 무탈하게 살아가는 동안 세상 곳곳에서는 급작스레 닥친 불행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무수한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었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나였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이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하루하루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두 번의 수술은 너무나 가혹했다. 의사의 말 한마디, 조사 하나에도 내 심장은 벌떡거렸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한 말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세상 물정 몰랐던 내게 닥친 시련을 감당하기엔 나는 너무 어렸고 미숙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하고 남편을 미워했다. 죄책감과 후회로 뒤범벅된 몸은 40Kg을 겨우 넘긴 몸무게가 말해 주었다.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치료를 받느라 자지러질 때 내 가슴은 진짜로 아팠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인 아픔을 느꼈다는 말이다. 밥통을 왜 바닥에 뒀을까?라는 후회로 시작된 고통스러운 복기는 지나온 모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욕망의 다름 아니었다. 혼자서 감당할 자신이 없어 친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남편 없이 홀로 아이 곁을 지켜야 했던 상황도 나를 지치게 했다. 손님처럼 왔다가 가는 시어른들도 보기 싫었고 멀리 있어 자주 오지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당시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숨을 쉬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노의 힘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 퇴원 후에도 몇 년간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통원치료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긴장으로 소화가 되지 않았고 혹시라도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봐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죄고 갔다. 지난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이는 자랐고 손바닥의 상처와 함께 내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흐려졌다.
어쩌다 입원을 하고 보니 갑작스럽게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고 그날의 일이 어제일 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아이의 사고를 겪은 후 한동안 화상환자의 사진 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트라우마를 겪었다. 죄책감에 시달렸고 우울과 분노는 쌍둥이처럼 따라다녔다. 불행의 얼굴은 저마다 다르지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무서운 진실 앞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절박은 물음은 ‘너에게도 언제든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싸늘한 답으로 돌아왔다. 나는 겨우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내가 엄청난 성장을 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도 가슴속에 상처 하나쯤은 품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비로소 나 아닌 타인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건 그 사건 이후였다.
내 눈물을 먹고 자란 아이는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자랐다. 죽을 것 같았던 고통도 한때의 사고로 정리가 되었고 ‘시간이 약’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를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들지만 그 마음으로 인해 더 이상 괴롭지는 않다. 엄마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내가 조금이라도 사람다워졌다면 아이 덕분이라고 믿는다.
아이의 고통을 담보로 나는 조금 성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