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생긴일
오늘도 나는 리스본 대성당 앞 오래된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옮겼다. 높낮이가 심한 리스본의 골목길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밤이 깊어지면 기온이 더 내려갈 것 같아 두꺼운 패딩까지 껴입고 온 탓이었다. 한국의 매서운 겨울과 달리 리스본은 그리 춥지 않았다. 낮에는 두꺼운 점퍼 하나로도 충분했다
‘벌써 시작했으면 어쩌나?’ 마음이 급해졌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울퉁불퉁한 돌이 깔린 길은 발걸음을 더욱 더디게 했다. 십 여분을 걸어 레스토랑 입구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숀 코너리를 닮은 매니저가 환하게 웃으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나는 가벼운 목례로 아는 체를 대신했다. 저녁마다 홀로 이곳을 찾는 동양의 여자에게 매니저는 불필요한 관심 대신 적절한 친절로 대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내가 용기를 낸 데는 매니저 영향도 있었다.
몇 년 전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따뜻한 날씨와 유쾌한 스페인 사람들 덕분에 해외여행의 긴장감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쾌활했고 동양의 이방인에게도 스스럼없이 친절을 베풀었다.
바싹 붙어 있으니 날씨도, 사람들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한국과 중국, 일본이 비슷하다고 단정 짓는 것처럼. 하지만 리스본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런 생각이 편견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스페인과 붙어 있는 포르투갈이었지만 두 나라는 많이 달랐다. 리스본은 어둡고 우울했다. 낡고 우중충한 건물은 그 자체로 오랜 시간을 증언하고 있었고 알록달록한 빨래가 아무렇게나 바람에 나부끼고 노란 트램이 도심의 언덕을 느릿느릿 오가는 리스본은 시간이 멈춘 도시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이방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도움을 요청하면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 저마다 성의껏 도와주려고 애썼다. 무심한 척 챙겨주는 요즘 말로, 츤데레 스타일이랄까. 스페인 사람이 외향적이라면 포르투갈 사람들은 내향적이었다. 리스본은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볼거리도 유명한 관광지도 없었지만 그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원래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강의를 들을 때면 언제나 구석진 뒷자리가 나의 고정석이었다. 그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남보다 일찍 강의실에 도착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기소개나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 전날부터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차례로 마이크가 돌아올 때면 심장 뛰는 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정도였다. 리스본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과 무관심이 싫지 않은 건 내성적인 성향 탓인지도 몰랐다.
홀 중앙에는 긴 테이블이 가로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 작은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첫날, 나는 중앙홀이 잘 보이면서도 벽 쪽에 면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았었다.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오늘도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누군가가 미리 예약이라도 해 둔 것처럼 말이다. 매니저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가리켰다. 메뉴판을 골똘히 보는 척했지만 오늘의 메뉴도 포르투 와인이었다. 평소 단 맛이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달착지근한 와인이 맛있다며 홀짝거릴 때 나는 적당한 바디감이 있는 달지 않는 와인을 고집했다.
“‘얘는 원래 술에 조예가 깊잖아. 우리같이 술 못 먹는 사람이나 달달한 와인을 먹지”
그냥 하는 소리인지, 비아냥인지 구분이 모호한 말들이 오갔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포르투 와인은 당도가 꽤 높았지만 알코올 도수 역시 높아 느끼하지 않았다. 깊은 단 맛이랄까, 혀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크리스털 잔에 담겨 나온 와인은 말린 장밋빛이었다. 피처럼 붉은 와인에 익숙한 나는 톤 다운된 와인색이 신기해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바쁘게 오느라 목이 말랐던 참에 와인 수혈이 시급했지만 천천히 맛을 음미한 뒤 조금씩 아껴서 삼켰다. 혀 끝에 맴도는 맛은 감미로웠고 식도를 타고 흘러 내려온 뜨거운 기운은 혈관을 돌아 다녔다. 단맛과 쓴맛이 교묘하게 섞인 와인은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잔을 반쯤 비웠을 무렵 홀의 불이 꺼졌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가수가 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의 기타리스트가 무심한 표정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정확한 타이밍에 그녀의 노래도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의 국민가요 ‘파두’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치 우리의 ‘창’처럼 목으로 소리를 내는 특이한 창법과 포르투갈의 국민정서가 담긴 애절한 노래는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낯가림이 심한 내가 늦은 밤까지 파두 카페에 앉아 있었던 이유였다. 파두의 매력에 빠진 나는 리스본에 머무는 저녁마다 파두 카페로 향했다. 파두의 선율을 따라 내 마음도 일렁였다. 가사는 알 수 없었지만 애절하고 슬픈 선율은 마음 깊은 곳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어두운 홀이 가려주어 흐르는 눈물을 굳이 수습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홀이 다시 환해졌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참이라 화들짝 놀랐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은 와인을 들이 킨 후 카페를 나왔다. 밤이 깊어 지자 스산한 겨울바람이 허전한 목덜미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2년 전 다녀온 리스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리스본에서의 추억은 파두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다시 리스본을 여행할 일이 생긴다면 저녁마다 출근 도장을 찍었던 리스본 성당 앞 파두 카페를 제일 먼저 찾아갈 것이다. 숀 코너리를 닮은 친절한 매니저와 구석진 자리가 아직도 비어 있다면 말이다. 깊어 가는 가을밤,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파두 선율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 볼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