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만 남아 덜그럭거리는 삶의 열차
설레는 마음으로 제법 큰돈을 지불하고 산 가방이 있다. 오래전에 점찍어 두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멀리서 바라만 보며 마음을 달래야 했던 물건이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우연찮게 돈이 생겼다. 그 길로 백화점으로 냅다 달려갔다.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많은 가방 속에서 내가 찜해 둔 가방은 유난히 더 예뻐 보였다. 주저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커다란 쇼핑백에 담긴 가방을 신줏단지 모시듯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 짝사랑의 결실은 황홀했다. 틈만 나면 가방을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영롱한 빛깔에 감탄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또 한 번 놀라면서 사랑스러운 아기 대하듯 가방을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흠집이 나지는 않았는지, 오염된 곳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났다. 해가 바뀌고 또 한 해가 저물었다. 영롱한 자태는 사라지고 은은한 색감은 어느새 칙칙하고 바래졌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도 눈에 들어왔다. 벗겨진 가죽은 피부병에 걸린 사람처럼 얼룩덜룩했다. 자연스럽게 새로 산 가방에 밀리면서 애지중지 사랑을 독차지했던 가방은 어느새 장롱 깊숙이 처박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서서히 잊혀졌다. 어느 날 옷장 정리를 하다가 잔뜩 구겨진 채 먼지를 뒤집어쓴 가방을 발견했다. 오래전 짝사랑의 대상은 헌신짝 신세가 되어 일말의 미련도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먼지 묻은 손을 털고 나니 개운함이 밀려왔다. 한 때의 소중했던 대상이 거추장스러워지는 순간, 열렬한 사랑의 대상이 폐기 처분되는 데는 애틋함이나 미련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권태와 싫증’이라는 복병 앞에서는 아무리 값비싼 가방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 때의 새 가방은 헌 것이 되었고 또 다른 새것에 의해 간단히 대체되었다.
<우리도 사랑일까>란 영화 속에는 결혼 5년 차 부부인 마고와 루가 나온다. 아내는 프리랜서 작가이고 남편은 요리사다. 부부는 누가 봐도 행복한 커플이다. 어느 날 마고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대니얼이라는 남자에게 강하게 끌린다. 그런데 하필 그 남자는 마고의 바로 앞집에 살고 있었다. 마고는 남편과 새로운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결혼생활은 흔들린다. 루에게서 더 이상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마고는 권태에 빠진다. 결혼기념일을 맞은 식사 자리에서 부부는 달콤한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음식만 먹는다. 5년 차 부부에게는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고는 결혼생활의 선배로부터 "새것도 결국 헌 것이 돼. 헌 것도 처음에는 새것이었지"라는 조언을 듣지만 흔들리는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루를 떠나 대니얼에게로 간다. 하지만 대니얼과의 결혼생활 역시 짜릿한 연애 감정이 사라지고 나자 루와 지냈던 시간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한 때 자석처럼 강하게 서로를 끌어당겼던 낭만적인 ‘연인’들은 입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양치질을 하고, 남편이 있는 욕실에서 태연하게 소변을 보는 나른하고 권태로운 ‘부부’로 바뀌었다.
눈에 씐 콩깍지가 빠져나가면 현실의 그(그녀)를 마주하게 된다. 에스 라인을 자랑하던 몸매는 사이좋게 디라인으로 바뀌었고 검고 무성하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군데군데가 빈 회색빛으로 변한다. ‘세월’이라 불리어지는 단어에 값하는 숱한 삶의 풍경이 어지럽게 쌓여 가는 동안 부부는 어느덧 ‘오직 한 사람’에서 ‘세상 속의 한 사람’이 되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별한 존재’가 무덤덤한 ‘보통의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누구도 잘못한 게 없지만 변화와 자극이 없는 관계는 지루하기만 하다. 관계 자체가 변한 게 아니라 관계를 바라보는 마음이 변한 것이다. 권태에 찌든 이들에게 내일은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하루에 불과하고 관성만이 남아 덜거덕거리는 삶의 열차는 단조로운 풍경 속을 천천히 달려간다.
사랑의 감정은 굳이 호르몬 운운하지 않아도 유효기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불타는 가슴으로 계속 살다가는 뜨거운 열기에 타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감정’으로서의 사랑보다 ‘기술’로서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했는지 모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롤러코스트를 반복하는 감정에 의지하게 되면 사랑의 열차는 얼마 못 가 멈추고 만다.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해야 힘겹게 지킬 수 있는 게 사랑이다. 이 길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 기어이 발을 내딛고 마는 어리석음을 탓하고 자괴감으로 후회의 눈물을 흘려봤자 틀어진 궤도를 수정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조차도 낡고 헌 것은 곧바로 폐기 처분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건 아닐까.
요즘은 가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새 가방보다 오래전에 구입한 낡은 가방에 더 손이 간다. 새 물건을 만났을 때의 설렘과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손 때가 묻은 가방이 주는 편안함과 익숙함에 더 마음이 가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