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버리고 간 건 아닐까. 불쌍해 보인다
- 영화 <아무도 모른다> -
쇠사슬, 자물쇠, 쇠막대기, 글루건,,,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이 도구는 어리고 연약한 9세 여아를 학대하는 데 사용된 물건이다. 창녕군의 한 편의점 앞 도로에서 잠옷 차림으로 도망치듯 뛰어가다가 이웃 주민의 신고로 발견된 아이의 온몸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머리는 찢어져 피를 흘린 흔적이 있었다. 손가락에도 화상을 입어 손톱 일부가 빠져 있는 등 끔찍한 상처가 아이 몸에 나 있었다. 아이는 쇠사슬이 목에서 풀린 틈을 타 베란다 난간을 통해 탈출했다.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창녕 아동 학대 사건에서 계부와 친모는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아이를 학대했다. 아무리 상상력을 쥐어짜도 쉬 그려지지 않는 학대, 아니 고문 장면을 연출한 주범은 남이 아닌 피를 나눠준 부모였다.
이 사건을 보며 오래전에 봤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작품 <아무도 모른다>이다. 도쿄의 변두리 한 작은 아파트에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엄마가 이사를 온다. 아이는 넷이고 아버지는 모두 다르다. 엄마는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집주인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바깥 외출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네 명의 아이들은 서로 의지 하며 좁은 집 안에서만 살아간다. 어느 날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다’는 쪽지 하나만 달랑 남긴 채 12살인 장남 아키라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엄마가 사라진다. 새로 만난 남자 친구와 살기 위해서였다.
영화는 엄마가 떠난 뒤 세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방치된 채로 살아가는 네 남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존재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네 아이들의 이야기는 영화적 상상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실제 일어난 ‘스가모 어린이 방치 사건’이란 실화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다.
아이를 방치한 채 떠나버린 엄마의 죄가 가볍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각기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는 하나 같이 양육의 책임을 회피한다. 아이는 분명 여자 혼자 낳을 수 없음에도 양육의 책임은 온전히 여자인 엄마의 몫으로 남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동 학대를 저지른 사람이 친아버지와 계모 모두였음에도 언론의 헤드라인은 언제나 ‘인성 나쁜 계모’ 탓만 한다. 부부가 함께 입건된 사건임에도 이를 알리는 제목은 어디에도 없다. 벼랑 끝에 몰린 미혼모가 아이를 유기할 경우에도 처벌은 여자만 받는다.
가족에게 모든 걸 떠 넘기는 구조 속에서 자녀 양육 또한 가족, 그중에서 특정 성별(주로 여성)에게 일임되었다. 가정해체나 위기 상황으로 인해 가족이 자녀를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아이들은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모순으로 켜켜이 쌓인 사회 구조의 밑바닥에서 깔린 아이들의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 사회는 귀를 막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방치된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지만 어른들은 굳이 끼어들려 하지 않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은 아키라에게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말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이 아이들만 남은,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집안 상태를 확인 하지만 그녀 역시 아이들의 삶에 개입하는 걸 꺼린다. 초라한 아이들의 행색을 조금만 눈여겨봤다면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아동 학대의 70~80%는 가정에서 일어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통계지만 가해자는 대부분 가족 구성원이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가정이 실상은 가장 위험한 공간인 셈이다. ‘가족주의’ 문화가 완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친권을 무소불휘의 권력인양 남용하는 이들로 인해 피해아동에 대한 수사가 자주 방해를 받는다. 남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온 문화와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정서가 학대를 방조한 셈이다. 법률상의 친권은 ‘자녀를 보호하고 고양할 의무’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따라서 부모가 이 의무를 소홀히 한 경우에는 친권이 박탈되어야 마땅하다.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이지 마음대로 유기하고 방치해도 되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이하게 커진 ‘친권’을 국가가 나서서 제어하지 못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어린 생명들이 피지도 못한 채 죽어갔다.
자녀가 직계존속, 즉 부모를 폭행했을 때는 패륜아라고 낙인찍히게 되어 가중 처벌된다. 하지만 직계비속, 즉 자신의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는 부모의 정당한 ‘훈육’으로 간주하거나 그 정도가 심각할 경우에도 처벌의 정도는 지나치게 가볍다.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남의 집 가정사’나 ‘부모가 알아서 한다’는 통념에 갇혀 방관한 결과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자식이 죽음을 당했다. 죄를 지은 부모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고대 바빌로니아 인들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원전 1700년경의 일이지만 21세기가 되어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하고 ‘가족이라서’ 모든 허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가족이라서’ 더 모를 때도 있고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이 질긴 족쇄가 되기도 한다.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 주는 상처는 더 아프고 힘들다. 회복되지 않은 상처는 평생 그 사람의 삶을 좀먹는 고통이 된다.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영문도 모른 체 학대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촘촘하게 짜야한다. 가족주의를 앞세워 몸을 사린 국가가 이제는 나서야 한다.
영화 속에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삶에 아이들은 서서히 지쳐간다. 결국 방치된 아이들에게 사고가 일어나고 이사 올 때 캐리어에 실려 온 막내 유키는 캐리어에 실려 떠나간다.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꽃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아이들은 꾸역꾸역 또 하루의 삶을 이어간다.
영화는 묻는다. 누구의 잘못인가? 정말 엄마 혼자만의 책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