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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Jun 05. 2022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은 아니지만 그의 에세이 제목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는 왜 쓰는가?’ 많이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건 사실이지만 다독하는 사람이 모두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에 대해 얘기했다. 


첫 번째는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두 번째는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셋째는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네 번째는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여러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밝혔지만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의 생각에 가장 동의하는 편이다. 네 가지 욕구 중 내 경우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욕구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아닌 척 해도 사실은 나도 관종이다.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고 똑똑해 보이고 싶고,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 내성적인 탓에 겉으로 드러나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다. 오웰이 말한 두 번째 욕구인 미학적 열정 또한 내가 글을 쓰는 강력한 동기이다. 아름다운 문장, 유혹적인 글귀 앞에서 나는 늘 굴복하고 만다. 아름다운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들의 능력을 강렬하게 질투한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도 신중하게 고른다. 퇴고를 할 때는 수십 번씩 원고를 읽느라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건져 올리기 위한 나름의 안간힘이자 부족한 글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강박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웰의 말대로 ‘미학적 열정’의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외에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자기 지향이 있고 독자들이 내 생각이나 감정에 공감하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니 이는 정치적 목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충동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간과 사회의 진실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런 동기로 나도 글을 쓴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퇴고할 때 원고를 너무 많이 본 피로감 탓이기도 하지만 읽을 때마다 고치고 싶은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손을 놓는 순간이 퇴고라는 말은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지인들에게 선물로도 준 적이 없다. 괜히 책을 홍보하는 것만 같아 손이 부끄러워서다. 게다가 책이란 물건은 호불호가 강한 편이라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선물로 받게 될 경우 냄비 받침대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스트레스받던 차에 인터넷 서점에서 내 책이 눈에 들어왔고 독자들의 리뷰가 달린 걸 오늘에야 확인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불성실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라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다. 책을 내고 나면 당연한 수순으로 독자들의 리뷰가 달리고 평점이 매겨진다. 광고성 글도 물론 올라오겠지만 진심 어린 리뷰를 쓴 독자도 분명 존재한다. 내가 독자들의 리뷰를 잘 읽지 않는 건, 정확히 말하자면 읽지 못하는 건 부끄럽고 무서워서이다. 초보 작가다 보니 독자들의 가벼운 비판에도 쉽게 기스가 날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스크롤 바를 내렸다. 우려와 달리 좋은 피드백이 대부분이었다. 별생각 없이 샀다가 새벽까지 다 읽었다는 독자도 있었고 책 곳곳에 밑줄을 치고 책장을 접어서 기억하고 싶을 만큼 좋은 대목들이 많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에세이에 공감하지 못했었는데 내 책만은 예외였다면서 잊지 못할 인생 책이라고 까지 후한 평을 남긴 독자도 있었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누군가 내 책을 읽고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다니… 새벽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니…소중한 마음들이 따뜻한 위로로 다가왔다.


흔히 작가에게 책은 자식에 비유되곤 한다. 쓸 때는 온 힘을 다해 정성을 쏟지만 일단 원고가 내 손을 떠나게 되면 자식을 독립시키는 부모의 마음이 되곤 한다. 홀로서기를 한 책은 이제 오로지 독자의 몫이 되어 그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손을 떠난 책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으려 했다. 물론 강연을 하게 되면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게 되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신경을 고수했다. 하지만 독자들의 생생한 리뷰를 읽은 오늘,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역시 나는 관종임이 분명했다. 

똑같은 일상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은 권태롭고 공허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지수가 무한정 상승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본질이 이러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허무와 권태는 예술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나에게는 글쓰기가 그렇다. 그래서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은 우울하고 글이 잘 써지는 날은 무릎 나온 운동복에 머리에는 새집을 이고 있어도 기운이 난다. 무한한 백지의 공간과 깜박이는 커서의 압박이 밀려올지라도 나만의 작은 세상을 짓고 허무는 과정은 무척 소중하다. 글을 쓰는 동기에 대한 조지 오웰의 견해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쓰지 않으면 권태롭고 허무해서 오늘도 나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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