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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Mar 07. 2022

하루 덕분에 하루가 충만해졌다

늦깎이 연애

늦깎이 연애가 무섭다고 했던가. 동생이 사랑에 빠졌다. 매일 그 녀석 얼굴을 보고 눈을 맞추고 만지고 비빈다. 이십 대 연인 못지않다. 사진과 동영상을 수시로 보내는 등 애인 자랑에 여념이 없다. 수려한 외모에 빛나는 피부,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몸매는 한눈에 봐도 매력덩어리였고 맑고 투명한 눈은 화룡점정이었다. 사진 속의 그는 ‘이래도 사랑하지 않을래?’라고 묻고 있었다. ‘루토’라는 다소 이국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는 40대로 추정되었다. 성격은 온순하고 진중한 편이라 낯선 사람과도 금방 친해졌다.


눈치챘는가? 맞다. 그는 반려견이다. 바둑알 같은 눈망울과 연하고 보드라운 털, 얇아서 팔랑거리는 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루토가 동생과 함께 살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동생의 딸, 즉 조카의 친구가 사정이 생겨 기르고 있던 반려견을 누군가에게 잠시 맡겨야 했다. 때마침 절친인 조카가 떠올라 부탁을 했지만 문제는 가장 오랜 시간을 지내야 하는 동생이 개를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개에 대한 공포는 어렸을 때부터 있었는데 만지는 건 꿈도 못 꾸었고 함께 길을  걸을 때면 개 감지 안테나라도 장착된 건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고 잔뜩 긴장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거나 아예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카는 제 엄마에게 선뜻 말을 못 꺼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의외로 동생이 순순이 승낙을 했다. 개와 동거를 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지만 루토는 그렇게 동생 곁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서워 멀찍이서 바라만 보던 동생은 점차 루토와 친해졌고 급기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루토가 떠날 날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반해버렸다. 정성스럽게 식사를 챙기고 청결을 위해 목욕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산책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었지만 루토를 데리고 매일 산책길에 올랐다. 안 그러면 애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서.


우리에게도 개를 길렀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사촌오빠가 갓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했다. 개를 싫어하는 엄마는 크게 반대했지만 자식들의 간절한 염원을 못 본 체할 수 없었던지 일단 키워보라는 애매한 말로 허락을 했다. 털이 하얗고 눈과 코가 까만 강아지가 쇼핑백에 담겨서 우리 집에 배달되었다. 종이 백 너머로 바둑알 같은 눈만 빠꼼히 내민 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어미 개와 떨어져서 불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강아지에게 ‘몽실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 주었다. 털이 복슬복슬하고 숱이 많아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몽실이는 새벽마다 낑낑대며 식구들의 단잠을 깨웠고 그때마다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은 동생이었다. 뜨겁고 몰캉한 생명체의 낯선 촉각에 두려워하면서도 칭얼대는 강아지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동생은 자기 방에 데려다 놓고 함께 잤다. 몽실이는 온갖 장난을 치며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뒷수습은 언제나 동생 몫이었다. 어느 날 시골에 마땅한 집이 나섰다며 몽실이를 그 집으로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정이 들 대로 들어버린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몽실이를 보내야 했다. 나는 아예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메어서 차마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몽실이의 존재는 ‘없음’으로 인해 더 도드라졌다. 가지고 놀던 헝겊 인형, 텅 빈 집과 밥그릇만 봐도 눈물이 났다. 당장이라도 어디선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는 개나 고양이 한 두리 마리 정도 키우지 않는 집이 드물 정도로 반려문화가 정착되었다. 부모 잘 만난 금수저(?) 강아지는 사람보다 나은 생활을 한다. 주인이 정성스레 만든 비건식을 먹고 앙증맞은 옷이 가득한 옷장에다 사회성 향상을 위해 유치원에도 간다. 스마트 폰으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때면 다음 생에는 강아지로 환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려’란 ‘짝이 되는 동무로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사랑을 주고받는 생의 동반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먹이를 주어 기른다는 ‘사육’과는 다른 말이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생명체를 키우는 일에 그다지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에 새롭게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즘은 지나가는 강아지에 자꾸 눈이 간단. 유튜브에서 반려견 채널을 구독하며 새 영상이 올라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다. 개를 키우면 부드러운 털이 곤두선 마음을 결을 차분하게 정돈해 주고 순진무구한 눈빛 속에서 오염된 내 마음을 세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머뭇거린다.  마음을 다해 작은 존재를 긍정할 수 있을까? 일방적인 사랑으로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서툴러서 다치게 하면 어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상실이 두려워 미리 차단막을 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동생은 루토를 주인에게 무사히 돌려보낸 뒤 새로 온 강아지 ‘하루’를 입양했다. ‘하루’ 덕분에 동생의 하루하루는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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