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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Jun 15. 2022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던 그때는 학생들의 인권이나 사고능력, 권리는 무시되었고 책임과 의무만 지나치게 강조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되어 마땅한 학급의 반장도 성적순으로 결정되었다. 성적은 학업능력을 판단하는 유일한 잣대일  아니라 아무 상관 관계도 없는 일에도 언제나 우선순위로 등장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엄청난 권력이었다. 엄마의 유별난 관심과 크게 애쓰지 않아도 성적이  나온 탓에(노느라 바쁜 아이들 틈에서 30분만 책상에 앉아 있어도 손쉽게 성적을 올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해가 바뀔 때마다 학급의 반장을  수밖에 없었다. ‘ 수밖에 없었다 표현한 것은 성격상 누군가를 리드하거나 지배하려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장이라는 자리언제나 곤혹스러웠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학기를 버텨야 하는 불편함은 학교 생활의 즐거움을 앗아갔다.


중학생이 되어 가장 기뻤던  키가 자라서도, 초등학생을 벗어나서도 아니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족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은 그때서야 아이들의 인지능력판단력을 조금이나마 인정해 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반장  투표로 치르게 되었다. 투표로 결정되는 선거에서 굳이 반장을 해야  이유는 없었다. 초등학교 때와 달리 성적과 반장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반장을 하지 않아도 어린 나의 자존심(?) 지킬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반장 자리에 대한 미련을 날려 렸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싫은 반장이었지만 6학년이 되어서도 성적순에 의해 반장이 되었고 부반장은 남자 애가 하게 되었다. 담임은 키가 작고 눈이 찢어져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남자였다. 성격이 깐깐했고 융통성이 없어 학부모나 학생들의 평가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반장이 하는 일은 자습시간에 떠든 사람 이름 적기, 담임교사의 지시사항 전달하기, 수업자료 판서하기  학급운영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이었다. 지금껏 내가 자연스럽게   일들이었다. 그런데 6학년이 되고 나니 무언가 상황이 달라졌다. 담임교사가 내가  일을 부반장인 남학생에게 대부분 맡기는 것이었다. 자리를 비울 때면 부반장을 불러내어 조용히 시키라고 지시하는  하면 떠든 아이 이름을 적는 것도 어느새 부반장의 일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담임이 뭔가 착각을 했거나 나름 공평한 업무 분장을 위해 역할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일의 몫은 줄어든 반면 부반장의 역할은 점점 늘어났다. 아무리 하기 싫은 반장이고 성적 때문에  떠밀려 맡은 일이었지만 이미 맡은 이상은  역할을 소화해 내는 것이 합당하고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점차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잘못을 해서 담임의  밖에  것은 아닌지, 반장 역할을  맡길 정도로 심각한 결격사유가 나에게 있는 건지 노심초사하며 불길한 상상을 했.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창피했고 자존심이 상해 부모님한테도 털어놓지      이루는 밤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아이들도 으레 이름을 적고 판서를 하는 것은 부반장의 일로 여기게 되었다. 나는 일명 바지 사장과 비슷해졌다. 공식적으로는 반장이었지만 실세는 부반장이었다.  학기 내내 담임교사의 부반장 편애는 계속되었고 영문을   없었기에 자존감에  상처를 은 채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라는 말만 수없이 삼켰다.  마디 설명도 없이 반장의 책무와 권리는 부반장에게 이양되었고 나는 허수아비 반장으로  학기를 모멸감 속에서 지내야 했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힘겨운 시간이었다,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는 십수 년이 훌쩍 지난 지난 어느  갑자기 안개가 거치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담임은 대놓고 성차별을  것이었다. 여자가 반장이  것을 받아들일  없었던 것이. 직접 반장을 뽑을  있는 권한이 있었다면 그는 남자를 반장으로 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도 규정이란  있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없었을 것이하필 성적이 가장 좋았던 아이가 여자였던 문제였다. 서류상 반장은 나였지만 실질적인 권한만큼은 남자에게 맡기고 싶었던 그는 어린 여자 아이의 마음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깨달음은 한참 후에야 왔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딸만 있는 집의 장녀로 컸지만 부모님은 아들 없음을 서운해하지 않았고 남의 집 아들을 부러워한 적도 없었다. 친척 어른들이 사촌 남동생에게 세뱃돈을 더 주거나 할머니가 막내 동생을 보며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하며 안타까운 푸념을 하는 것 정도가 내가 받은 성차별의 전부였다. 차별하냐고 부모님께 툴툴대면 우리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인지 담임이 성차별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생을 차별하는 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어린 나는 알 수 없었다.


가부장제라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담임은 여자애가 감히 남자 애들 이름을 적거나 지시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으로 대변되는 ‘남자혹은 ‘가부장 체제 대한 도전이라고 보았던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슬그머니 남학생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명백한 성차별이었다. 그는 군사 독재의 잔재가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었다. 가부장 문화의 희생양이자 가해자로 새로운 가부장을 생성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던 시대의 사람이기도 했다.


가부장제는 남녀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회적으로는 많은 폐해를 낳아 진보와 성장을 더디게 했다. 여혐, 남혐  수많은 혐오를 양산했으며 적대적 이미지 선동으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했다. 젠더 감수성은 단순한 평등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 가깝다. 젠더는 사회, 문화적 개념이므로 급변하는 사회에 대해 공부하지 않으면 따라갈  없다. 정답이 영원히 옳을  없고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젠더 감수성을 이해하게 되면 연인, 부부 관계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있게 되고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 성숙된 태도를 기를  있다.


 남자 교사의 성차별적인 행동은 어린 초등학생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의문과 상처를 남겼다. 젠더 감수성이란 개념이 전무하던 때의 일이었다. 생물학적 차이가 차별을 만들고 법과 권력이 차별을 더욱 부추겨 신념과 가치로 공고히 자리 잡은 이래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을의 목소리가 갑의 권위와 기세에 눌리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시대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을의 목소리에  기울이고 그들의 외로움을 함께 나눌  변화의 싹이 자랄  있다. 페미니즘은 남녀 사이의 힘겨루기나 흠집 내기가 아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고  문은 남녀 모두를 향해 열려 있다. 페미니즘, 젠더 감수성은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는 세상을 위한 아젠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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