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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24. 2022

윤희에게

삶과 외로움을 통째로 앓고 있는 세상의 윤희들에게

“오겡끼데스까~~”신드롬을 일으킨 청순한 여배우가 나오는 영화 <러브레터>를 봤을 때, 눈 덮인 오타루의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4년 전 갑작스럽게 일본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주저 없이 홋카이도를 택한 이유였다. 아쉽게도 겨울이 아니어서 하얀 눈은 보지 못했지만 오타루 시내를 가로지르는 운하 사이로 저녁 어스름에 하나 둘 켜지던 가로등 불빛은 제법 몽환적이었다. 영화 <윤희에게>의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 관람을 결심한 건 배우 때문도 감독의 영향도 아니었다. 배경이 오타루라는 게 유일한 이유였다. 그렇게 조금은 싱거운 이유로 윤희와 만나게 되었다.


윤희에게


처음 본 당신의 얼굴은 살아 있다기보다는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습니다. ‘외로움’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얼굴을 보여주면 바로 알 것 같았으니까요. 오죽하면 당신 딸이 “엄마랑 아빠랑 이혼할 때 내가 왜 엄마랑 산다고 한 줄 알아?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여서.”라고 했을까요. 새봄이의 눈에도 당신은 위태로워 보였나 봅니다.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어느 날 20년 전 헤어진 첫사랑에게서 날아온 편지 한 장을 받게 되고 모른 척 여행을 제안하는 딸의 손에 이끌려 당신은 홋카이도현의 오타루로 떠납니다. 허리까지 쌓인 눈과 고즈넉한 겨울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곳에는 첫사랑 쥰이 고모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수의사가 되어 아픈 동물을 치료해 주는 쥰의 눈빛은 당신을 닮았습니다. 오래 망설이다 쥰의 집 앞까지 찾아간 당신은 그녀가 나오자 숨어 버립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20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뒤로하고 아프게 돌아서야 했던 것일까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졌지만 당신에게 쥰은 지나간 존재가 아니었나 봅니다. 예상치 못한 조우를 감당할 힘이 없었던 당신은 쿵쿵 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몸을 숨겼지만 안도하는 표정 속에는 공허와 쓸쓸함이  배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그녀로 인해 여전히 요동친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사랑’ 임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니까요.


낯선 도시에서 아픈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린 당신은 그간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한 가족들은 당신을 정신 병원으로 보내고 오빠의 소개로 강제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꿈을 포기해야 했고 당신이 포기한 꿈의 대가로 오빠는 대학에 갑니다. 연인과 헤어지고, 가족에게 부정당한 채 원치 않는 결혼을 한 당신의 삶이 행복했을 리 없겠지요. 쥰 역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또 다른 여성에게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라는 조언을 합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동성애를 곱게 바라보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쥰의 삶 역시 외롭고 고단했을 테니까요. 가부장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배경처럼 드리워진 곳에서 ‘여자’ 이자 ‘성소수자’로 숨죽인 채 살아야 했던 당신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너는 사람을 외롭게 해’라고 당신의 오빠와 남편은 질책했지만 정작 가장 외로운 사람은 윤희, 당신이었습니다.


“윤희니?” “오랜만이네” “그렇네” 눈발이 날리는 오타루 운하에서 당신과 쥰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거리를 둔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당신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오래전 연인들은 이렇다 할 대화도 없이 그저 하얗게 쌓인 눈길을 말없이 걷기만 합니다. 긴 시간의 간극을 건너 마주한 당신과 쥰은 말 대신 눈빛과 발자국 소리로 서로를 느낍니다. 몸은 멀리 있을 지언정 마음의 시차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순간은 짧고 미완으로 끝난 사랑은 지독한 상처로 남아 남은 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할지도 모르니까요. 사랑의 모양이 남과는 조금 달랐던 당신은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생이 “벌(罰)처럼 느껴졌다"라는 당신의 말속에는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치러야 했던 대가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존재를 부정당하고, 거짓 정체성으로 살기를 강요한 가족과 사회로 인해 당신은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쥰을 만난 당신은 비로소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나 당신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한 것이 잘못이 아니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기에 더 이상 자신을 벌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당신이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으로 인해 치유받았습니다. 시크하고 무심해 보이는 딸이 위태로운 당신 곁을 지켰고 잃어버린 옛사랑을 복원시켜 주었습니다. 쥰의 곁에는 고모 마사코가 있어 20년간 부치지 못한 편지를 대신 부쳐 주었습니다.


멋대로 ‘정상’을 규정해 놓고 하루 빨리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것을 강제한 사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의 삶을 '정상'으로 돌려놓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조용히 지켜본 사람들 덕분에 무색무취로 살아온 삶은 비로소 생기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윤희’도 아닌 고유한 ‘윤희’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랜 세월 부정당했던 쥰을 향한 당신의 마음과, 함께 한 시간을 긍정하면서 당신은 자유로워집니다.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내고 싶었지만 두려움 때문에 도망쳐야 했던 당신, 폭력적인 세상에서 위로를 구할 수 없었던 당신은 이제 수줍은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차분한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실리네요. 당신 마음에 내린 눈도 언젠가 그치겠지요. 삶과 외로움을 통째로 앓고 있는 세상의 모든 ‘윤희’들에게 어떤 사랑도 괜찮고, 어떤 인생도 빛난다는 것을 알려준 당신, 참 고맙습니다.


눈쌓인 오타루의 풍광과 애틋한 사랑을 뒤로 한 채 극장을 나왔다. 11월의 거리는 가을을 지나 본격적인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다. 눈덮인 오타루 운하가 보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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