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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24. 2022

작업실이 생겼다

네가 없는 방은 너무 허전해

얼마 전 큰 아이가 독립을 했다. 직장을 다닌 지 1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집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거리가 있다 보니 몸도 마음도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했으니 이제 내 보낼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던 차라 주저 없이 이사를 결정했다. 아이가 짐을 빼고 나니 텅 빈 방이 남았다. 서운한 마음도. 잠시 가슴은 설렘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이의 방을 나만의 공간으로 꾸미기로 했다. 바랐던 작업실의 꿈이 얼떨결에 이루어진 것이다.  상상했던 방식으로 꿈이 이루어진 건 아니다. 집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비밀스러운 작은 왕국을 꿈꾸었지만  괜찮다. 아무렴 어때.


책상은 아이가 쓰던 걸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기로 하고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은 조명이었다. ‘이케아’와 ‘오늘의 집’을 번갈아 들락거리며 품을 판 끝에 마음에 드는 조명을 찾아냈다. 글을 쓰다가 잠시 쉬면서 커피라도 한 잔 하기 위해서는 소파와 테이블도 필요하다. 아담하면서 톡톡 튀는 색상으로 포인트를 주고 싶었다. 겨자색에 가까운 노란색을 주문하고 나니 너무 튀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됐다. 하지만 소파를 들여놓는 순간 노란 등불이라도 켜진 듯 방이 환해졌다. 우중충한 그림에 고운 물감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확 달라지는 그림처럼 말이다. 신이 나서 요즘 유행하는 자연주의 컨셉에 따라 식물도 하나 주문했다. 우리 집에 기거하고 있는 화분은 죽지 못해 살고 있다. ‘더는 못 살겠다 제발 죽게 내버려 둬’라는 식물의 아우성을 못 들은 채 외면하고 말라죽기 직전에야 화들짝 놀라 물을 주기 때문이다. 생기 없이 시들시들한 식물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어 더는 생화를 들여놓지 않는다. 조화를 선택하게 된 건 이런 사연 때문이다. 포장을 뜯자마자 부드럽게 휘어지는 잎사귀, 자연을 닮은 초록 초록한 색감, 약간 마른 줄기까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 옆에 나란히 두었더니 아름다운 실루엣까지 만들어 주었다. 내친김에 블라인드는 대신 커튼을 달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고 나니 나만의 안온한 공간이 완성되었다.


세 아이가 복작대는 집은 언제나 공간이 부족했다. 아이들 물건과 옷으로 어수선했고 컴퓨터와 책상이 차지한 공간은 오로지 기능적인 역할만을 위해 존재했다. 어쩔 수 없이 거실에 큰 책상과 컴퓨터를 두고 사용했다. 하지만 사방이 오픈된 공간이었고 가족 공동이 사용하는 곳이었기에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마저도 남편이나 아이가 사용해야 할 때는 식탁으로 쫓겨나야 했다. 거실과 주방을 오가다 지치면 카페로 피신했다. 몇 천 원으로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적절한 백색소음이 글쓰기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초등 동창들이 우르르 들이닥치거나 우렁찬 성대를 자랑하는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고요는 무참히 깨진다 노트북을 챙겨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작업실에 대한 열망은 재크의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났다.


대형 책상과 컴퓨터가 세팅되어 있고 작은 부엌이 있어 토스트와 커피는 언제든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공간. 폭신한 소파에서 음악을 듣거나 프로젝트로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편안한 장소를 꿈꾸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비밀의 방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로망도 공간에 대한 욕심을 키웠다.  


어릴 때 살았던 좁은 집, 동생과 같이 써야 했던 작은 방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았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나만의 굴속에서 칩거하고 싶었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채워지지 않은 결핍은 공간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아우슈비츠가 공포스러운 것은 배고픔이나 가혹한 노동,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니다. 프라이버시의 소멸이 그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좁은 공간, 다닥다닥 붙은 침상에서 사생활은 불가능했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격마저 지킬 수 없었다. 일체의 프라이버시가 허용되지 않는 수용소에서 개인 공간을 상실한 이들에게 삶은 곧 의미 없음과 동의어였다.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조차 확보되지 않은 삶은 심리적 공간의 부재로 이어지고 한 사람의 고유한 스토리는 사라지고 만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 초등학교 운동장, 할머니가 반겨주는 외갓집은 무수한 이야기의 산실이다. 공간이 곧 스토리가 되고 누군가의 삶이 되는 것이다.


큰 아이의 독립과 함께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이 공간에서 나만의 이야기,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은은한 조명, 노란 소파가 놓인 아늑한 동굴에서 매일 글을 쓰리라는 야무진 다짐을 해 본다.


딸아, 엄마는 네가 없는 방이 너무 허전해.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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