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에게 말을 걸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낮에는 교사, 밤에는 글 쓰는 사람이라는 두 개의 자아로 살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본캐는 교사, 부캐는 작가인 셈이다. 부캐는 ‘부캐릭터’의 준말로 게임용어다. 본캐가 게임 시작부터 쭉 키운 캐릭터를 의미한다면 부캐는 본캐로 못 해 본 것이나 본캐가 지루해질 때 쓰는 다른 캐릭터다. 이 단어가 일상생활 용어가 되면서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나 캐릭터로 행동할 때’라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따지고 보면 부캐는 그 유래가 꽤 오래되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두 개 정도 가지고 있던 별명이나 종교인들의 세례명, 옛 선인들이 즐겨 쓰던 호나 필명 등도 일종의 부캐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연예인들도 한 두 개의 부캐를 가지고 있다.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낯선 모습에 열광하고 본인 스스로도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교사’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살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하고 퇴근 후에도 아이들 생각, 학교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주말과 방학이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은 ‘방학이니 잠시 쉬어갈게요’라고 봐주지 않는다. 학생들 신상에 문제라도 생기면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고 방학에도 허겁지겁 달려 나가야 했다. 열정, 성실, 자기 계발, 긍정 마인드를 장착해야 살아남는 ‘본캐’의 세상에서 점점 지쳐갔다. 물론 더 열심히 몰입해서 일이 주는 즐거움(?)에 푹 빠지거나 야자수가 우거진 휴양지에서 모히토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방법도 있다.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리는 것도 괜찮은 처방 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도 내게는 일회성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자아는 두 개의 정체성을 낳았다. 직장인으로 살 때와 작가로 살 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이성적이고 건조한 모습으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빈틈을 보이기 싫어 쓸데없이 힘을 쓰는 직장인이 나다. 취향이나 관심사를 드러내지 않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비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퇴근 후 컴퓨터 앞에 앉으면 다른 사람이 된다. 수다쟁이가 되어, 민지, 혜지, 영지처럼 예쁜 이름의 ‘백지’라는 친구에게 마음을 탈탈 털어놓는다. 백지는 말없이 나의 투정을 받아준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된 감정은 백지 위에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박힌다. 내 마음의 풍경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속이 후련해지고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은 어느새 잠잠해진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도 정리를 마친 서랍처럼 단정해진다. 글 쓰는 자아가 발동하는 순간 직장에서 꽁꽁 숨겨왔던 나의 솔직함이 드러낸다. 좋아하는 사람, 상처받았던 일, 가족에 대한 양가감정을 드러내며 새로운 정체성으로 사는 해방감을 만끽한다. 부캐로 살아갈 때만큼은 본캐가 부과한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부캐는 은밀한 쉼터이자 삶의 위안처다.
MBTI가 유행이다.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너는 이러이러한 유형의 사람이다’라고 알려준다. 하지만 모든 인간을 16가지의 단순한 틀로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칫 잘못하면 독특한 개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누군가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신선함을 느낀다. 고리타분한 부장님이 바이크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성실하고 모범적 이미지의 교사가 유튜브 채널 속에서 엉뚱 발랄한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을 봤을 때 마음속에서 수많은 느낌표와 물음표가 솟아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네가 많은 사람 앞에서 강연을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학창 시절에는 굉장히 소심하고 부끄럼도 많았잖아”라고 했다. 맞다. 부끄럼 많고 소심한 것도, 수십 명의 청중 앞에서 떨지 않고 마이크를 잡는 것도 나다. 나 자신조차도 몰랐던 내 모습이다. 최근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부족했던 과목 중 하나가 미술이었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랍기만 하다. 칼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내 안에는 도대체 몇 개의 자아가 살고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
몇 개의 가면을 바꿔 쓰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멀티 페르소나를 자아의 분열이라고 진단하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환승할 수 있다면 훌륭한 삶의 기술이 될 수 있다. 본캐가 지루해지면 부캐로 살고, 부캐가 심드렁해지면 언제든 본캐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마트료시카처럼 다양한 캐릭터가 공존하는 사람도 괜찮지 않을까.
부캐가 본캐가 되는 날을 꿈 꾸며(그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오늘도 나는 부지런히 백지에게 말을 건다.